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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힣 Dec 07. 2024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
‘타자’가 아닌 ‘너’라는 이웃

책 <동자동 사람들> 을 통해, 시선 재고의 필요성을 느끼며. 

안녕하세요. 저는 모 대학교 학생입니다.

한 과목을 1학년 2학기 교양으로 수강했습니다.

제게 인류학과 문화 연구의 매력을 알려준 소중한 과목이였답니다. 

이과인 저에게 마냥 쉽지많은 않은 과목이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과 시각, 사회 구성원으로서, 사람으로서 갖추어야하는 태도를 제시해준 소중한 수업이었습니다. 

저와 같은 대학에 재학중이신 분이 이 글을 보신다면, 이 수업을 듣길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 



중간고사 대체과제로 책 <동자동 사람들> (정택진, 빨간소금, 2021) 읽고 서평을 썼습니다.

브런치 작가 첫 글로 제 과제물을 올려봅니다.  

다들 따뜻한 겨울 보내세요. 



 책 <동자동 사람들>의 소단원 <분리된 두 세계>에는 2019년 동자동을 방문한 자원봉사 고등학생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학생들은 자기 주변의 환경을 쪽방촌과 대조하면서 ‘새롭게’ 바라보며 자신이 누리는 것에 감사함을 누린다. 자신의 세계인 ‘집’과 여기 ‘쪽방촌’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된다. ‘집’의 바깥에 존재하는 ‘쪽방촌’ 세계를 통해 ‘집’의 세계가 공고해진다.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는 완전히 분리된 두 세계 사이 틈새만큼 먼 거리가 존재한다. 학생의 “어떻게 이렇게까지 왔을까?”라는 말은, 빈곤의 원인과 빈곤을 초래한 구조적 문제에 의문을 제기하며 이는 ‘커서 저렇게 되면 안 되겠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어른이 되면 결코 자신이 목격한 주민처럼 되지 말아야겠다는 학생의 다짐에서 쪽방촌 주민은 부정적 미래를 그대로 보여주는 ‘타자’로 등장한다. 그들은 바라보기에 ‘안타까운’ 대상이긴 하지만, 동일한 시스템 속에서 연결된 존재는 아니다. 쪽방촌 주민이 경험하는 모든 상황은 자원봉사 고등학생들에겐 피해 가야만 하는 것들일 뿐이다. 고등학생들은 그들을 ‘나’와 ‘너’로 인식하지 않는다. 타자화된, 이웃으로서가 아니라 타인과 상황으로 인식되는 대상들은 그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의 한 예시일 뿐이다. 



 미래사목연구소의 <쪽방 주민들의 희망 이야기>에 의하면 쪽방촌 주민들은 ‘조합’을 만들어 의료비와 명절 행사 비용을 연 2% 정도 이자율에 대출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기생 수’라고 말하는, 가난과 빈곤 혐오에 관한 블로그, 카페, 유튜브 댓글을 보다가 쪽방촌 사람끼리 서로 유대하며 잘 지내보려 노력한다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오랜만에 접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는 쪽방촌 주민들을 ‘이웃’으로 바라보지 않고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쪽방촌 사람끼리 조합을 만들어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지내는 모습을 보고 무기력해 보이기만 했던 사람 중에서도 잘살아 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기차역에서 교수님께 담배 한 개비를 요구하던 노숙자에게 한국인은 정이 있어서 하나 달라고 하면 세 개비를 주는 것이 예의라며 담배 세 개비와 먹던 음식을 주었다는 이야기이었다. 지난달, 친구들과 광주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원역으로 향하던 중 계단에 쭈그려 않아 구걸을 하는 노숙자를 마주쳤었다. 그 순간 노숙자를 ‘너’로 인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무섭기도 했고, 별로 청결하지 않았고, 내가 노숙자분의 상황까지 신경 써야 하나 싶어 죄책감과 함께 불쾌한 감정이 들어 빠르게 지나치는 데 급급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똑같은 행동을 할 것 같다. 노숙자는 나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기도 하고, 터놓고 말하자면 그냥 다른 세계의 사람, 굳이 이야기할 일 없는 사람들이기에 나의 인식 밖에 있기도 하였다. ‘타자’라고 인식되지도 않고, 뉴스 기사를 볼 때 나오는 ‘키워드’ 같은 대상이었다.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CF 감독 상수가 보육원에 방문했을 때 한 대사 중 “나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서 유년 시절 행복하게 보내고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가고 성공했어.” 가 있다. 나도 적당한 집에서 태어났다. 넘치도록 부유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크게 부족하지 않은 안정적인 가정에서 삼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하라며 소위 말하는 학원 뺑뺑이를 돌았고, 먹고 싶은 건 다 사 먹으라던 부모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으며 부모님의 카드를 들고 다니며 항상 친구들과 주전부리를 사먹었다. 아버지는 늘 늦게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딸을 밤길에 혼자 걸어오게 할 수 없다며 매일 새벽에 나를 독서실에 데리러 오셨다. 어머니는 내가 독서실에서 나올 때면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물으시고 내가 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요리를 해주셨다. 생각이 많고 유독 여렸던 성격 탓에 고민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응원해 준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었다. 크고 작은 갈등과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항상 걱정 없이 행복했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큰 사건·사고 없이 무난하게 학창 시절을 보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름 알아주는 대학인 경희대학교에 입학했다. 이제 열심히 전공을 공부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대학원에 가든 취업을 하든 안정적이고 명망 있는 직업을 얻으면 CF 감독 상수가 말한 성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비관적으로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다고 생각하면 내가 제일 사연 있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드라마 속 보육원 아이들의 이야기와 책에서 읽은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니 내 사연은 정말 별거 없게 느껴진다. 만약 내가 빈곤한 상황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면 지금의 나로 자랄 수 있었을까? 직접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 아니라고 답하기도 어렵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어릴 적 나는 꿈꾸면 모두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꿈에도 자격이 있는 것 같다. 그 누가 빈곤하게 태어나고 싶어서 빈곤하게 태어났겠는가. 근데 불공평하다고 불평만 하면 바뀌는 것이 있을까? 내 부모님은 아무 노력하지 않으시고 현재 자리에 계시는가? 나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현재 자리에 있는 것인가? 노동조합을 이뤄 자급자족하는 쪽방촌 사람들이 대단하기도 하면서, 정부의 보조금이 없었다면 그런 조합마저 만들 수 없지 않았을까? 그럼, 결국 자신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지 않으냐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다수가 빈곤하고 무기력한 삶을 나라 탓, 남의 탓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옛날 전래동화를 읽어보면 대게 가난은 선하게, 부는 악하게 그려진다.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적으로 도와줘야 하는가? 가난하게 태어난 건 죄가 아니지만 가난하게 죽는 것은 죄라는 빌 게이츠의 말이 있다. 완전하게 공감할 수는 없는 말이지만 노력하면 가난한 상태에서 바로 부자가 되긴 힘들더라도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시대라지만, 유명 개그맨인 이수근은 쪽방촌에서 태어나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아는 스타가 되었고, 이성경 역시 가족들과 쪽방에서 살았지만 유명한 모델이자 배우가 되었다. 이런 사례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용이 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개천이 아니라 한강과 금강이라고 할지라도 용이 많이 나는 것은 힘들다.  



 쪽방촌에 관한 내용들을 찾아보던 중 유튜브 KBS 시사 채널에서 KBS 시사 기획 창 357회 <쪽방촌 계급사회>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었다.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교차로로서의 문화’가 떠올랐다. 교차로로서의 문화는 관통하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는 없지만, 각자 자신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참여하는 활동 공간을 일컫는 말이다.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를 그 예로 드셨다. 특정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았던 이 시위는, 동방신기와 빅뱅 팬덤이 처음 시작하였으며, 이후 20 30여 성, 40대 운동권 사람들이 각기 다른 목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다큐멘터리 속 쪽방촌을 구성하는 사람들 역시 각기 다른 이유로서 존재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쪽방에 몰려든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을 종교의 힘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목사님, 누구보다 쪽방촌 사람들을 위하는 것 같은, 범죄자마저 숨겨주는 동장과 쪽방 세를 받는 집주인들까지 모두 쪽방촌을 구성하지만 각자 다른 이유로서 쪽방촌에 남아있었다. 종교를 믿지 않는 나로서는 나의 모든 힘을 다하면서까지 빈곤한 사람을 구제해야 하나 싶으면서도 이유가 어찌 되었든 결과가 좋으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께서 이야기하신 1호선 예수 천국 불신 지옥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쪽방촌 노인들을 도움과 동시에 포교 활동을 하면 이런 결과가 생기지 않을까 싶다. 범죄자들을 수색하기 위해 경찰관이 찾아왔을 때,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사연 있는 사람들이라며 거주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 동장의 모습이 터놓고 말해서 역겨웠다. 어떤 이유였든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삶이 힘들다고 해서 모두가 죄를 짓는 것도 아니다. 힘든 상황에 부닥쳤음에도 불구하고 더 힘든 사람을 돕겠다며 모금 활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또한 쪽방 세는 쪽방의 여건에 비해 높이 책정되어 있다. 쪽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보증금을 낼 몫의 돈이 없어 쪽방 이외의 다른 곳은 꿈도 꾸기 어렵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 재개발도 거부하며 속된 말로 버티는 쪽방촌 주인들의 모습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았다. 나에게 쪽방촌은 ‘교차로로서의 공간’으로 다가왔다. 번화하고 바쁜 서울 도심 바로 옆에 존재할 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쪽방촌이라는 장소는 화려한 도시인 서울을 동경하던 나에게 도시의 어두운 이면이다. 농촌에는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는데 쪽방촌 노인들을 다 함께 농촌으로 이주시켜서 소일거리를 시키면 어떨까. 주거 공간도 넓어질 것이고, 심심하지도 않고 돈도 벌고 새로운 인간관계도 만들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왜 이런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을지 알아보니 오랫동안 거주해 익숙한 서울이라는 도시를 굳이 떠나고 싶지 않아 하며,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삶을 위해 노력하기엔 이미 무기력한 상태에 놓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외부 사람이 제시한 그럴듯한 대안은, 교차로로서 쪽방촌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겐 차선책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안이었다. 



 처음 책 <동자동 사람들>을 읽었을 때는 나 역시 앞서 말한 자원봉사활동을 온 고등학생들처럼 쪽방촌 사람들을 ‘타자’로 인식했다. 물론 지금도 그들을 ‘너’이자 ‘이웃’이라고 완전하게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에 관한 자료들을 찾아보며 나로선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들도 각자의 사정이 있음을, 그리고 현실에 순응한 사람도 있지만 그 속에서 나름의 시스템을 구축하고 유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쪽방촌의 위생적이지 못한 외관만 보고 그 내부를 살피려 하지도 않았다. 화려하고 볼 것 많은 도시가 바로 옆에 펼쳐져 있는데 쪽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저 안타까운 사람들, 나에겐 오지 말아야 하는 미래 정도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암울한 현실을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도서를 읽고 각종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하나로 뭉뚱그려진, ‘쪽방촌’은 암울한 미래라는 시각에서, 교차로로서의 공간인 ‘쪽방촌’ 그리고 그 공간을 구성하는 개개인들을 인식하고 조금이나마 ‘너’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이해하려고 귀를 기울이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세상엔 신경 쓸 것이 매우 많음으로 그다지 큰 관심과 시간을 쏟으려고 하지 않은 채 ‘타자’로 남겨두었었다. 앞으로는 섣부르게만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섣부르게 ‘타자’라고 정의 내리지도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그들을 ‘너’와 ‘이웃’으로 바라보며 조금 더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교수님께서 눈과 귀를 막은 채 주류의 의견만을 맹신하고 소수자의 의견을 묵살하는 방관자가 되기보다는, 낮은 위치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소수자를 위해 싸울 필요가 있다고 하셨다. 지금 당장의 나는 쪽방촌 사람들을 위해 싸울 것 같진 않다. 다만 내가 ‘너’로 인식했으며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경우 그들을 위해 투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멀리서 대상으로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한 명 한 명 ‘너’라는 사람으로 바라보니 약간은 이해가 된다. 저마다 살아가야 하는 각기 다른 이유를 갖고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에게 나와 다르다고 어떻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개개인이 주어진 위치에서, 때론 원하는 위치에서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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