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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mi 레미 Jun 18. 2024

첫번째 꿈 (feat. 중학교 생활기록부)

얼마전, 정부24에 들어갔다가 생활기록부를 보았다. 나의 첫 꿈은 '의류사업가'다.

중학교 때 수학여행 3박 4일 동안 무슨 옷을 입을지 몇날 며칠을 고민하고 쇼핑하고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그리고 어렸지만 나름대로 똑같은 옷을 입는 일은 없도록 여러 벌 챙겨가는 등 스타일링도 매우 신경썼다.


부모님이 바라는 진로희망 칸에 '한의사'가 적혀있는 걸 보니, 부모님의 간절한 바램을 적어놓으신 듯 하다.

나는 한의사와는 동떨어진 (성적이 암담한..)신나는 학창시절을 보냈기에 전혀 현실성이 없다.

다음 해에는 부모님도 타협하고 '의류사업가'로 적어주신 것 같다.


담임 선생님이 작성하신 특기사항 부분에는

1) 신문 읽기를 좋아하고 자료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을 좋아함.

2) 기술, 과학 과목에 흥미가 있으며 특히 첨단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있음.

3) 올 한해 신문 사회면을 빠지지 않고 읽으며 세상읽기를 함.


위 세가지는 신기하게도 여전히 내가 좋아하고 하고있는 것들이다.

인간이란 역시 변하지 않는 걸까?


뇌가 말랑말랑하고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어떤 자연의 상태에서 내가 세상에 처음 가졌던 호기심, 나의 관심사들이 어쩌면 나라는 사람의 본성에 기반한, 내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진짜 관심사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연봉도, 미래 안정성도, 사회적 명예도, 여러가지 고려하지 않은채 내가 선택했던 것.

청소년 때나 성인이 되어서나 관심사가 똑같은 건 정말 신기하다. 담임 선생님들께서 그걸 캐치하고 기록해주시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다.


기술, 과학에 대한 어느순간 생겨난 반짝인 관심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랬다는 걸 다시 알게 되었다.



내가 작성한 진로희망란에 '잡지 에디터', '의류 사업가'는 이런 의미로 작성했던 것 같다.

- 패션과 관련된 컨텐츠/글을 작성하는 일

- 디자인을 기획해서 의류를 제작하는 일


여기서 '패션'이라는 것만 빼면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일의 동사는 같다.

- 컨텐츠/글을 작성하는 일

- 기획하고 (프로그램 등을) 제작하는 일



내가 꿈에서 '패션'을 지우게 된 계기는 뉴욕에서 '패션'일을 해보고 난 다음이었였다.

패션에 대한 관심으로 프랑스어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 졸업 후, 맨해튼 소호에 위치한 패션 쇼룸에서 세일즈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곳은 B2B 쇼룸으로 컨템포러리 브랜드 약 15개를 쇼룸 매장에 진열하고, 유럽/미국 바이어들이 다음 시즌 제품들을 선주문해가는 도매 형태의 회사(한국에는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였다. 미국 최대 규모의 패션쇼 중 하나인 Coterie쇼 등 3차례 패션쇼 부스도 운영하고, 미국 온/오프라인 패션 브랜드 시장조사, 바이어 미팅 등 내가 꿈에 그리던 업무들을 해볼 수 있던 꿈의 기회였다.


특히 Javits Center에서 열리는 대규모 패션 박람회에 가서 부스마다 다른 브랜드들을 한꺼번에 보면서 트렌드를 파악하고, 카테고리별로 특징을 찾아내서 분석하고 인사이트를 얻고 공유하는 게 가장 가슴뛰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아주 일부였고 대부분의 날들은 매우 괴로웠다.

뉴욕 패션회사에서의 나는 마치, '하이에나들이 득실득실한 정글에 던져진 순한 양' 같았다. 하루하루가 전쟁같았고, 내가 그동안 살아온 환경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일을 하면 할수록 정신 건강이 안좋아졌다. 본능적으로 나에게 유해한 환경이라는 걸 깨달았다.


일하면서 느꼈던 나의 한계와 구조적 한계, 앞으로 내가 이 방향으로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내가 내린 대답은 너무나도 'No'였고, 이 부분에 있어서 나의 생각이 매우 확고했다. 특히 패션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뉴욕 패션계에서 근무하면서 No였는데, 한국에 돌아가서 Yes일리는 더더욱 없었다. (연봉, 근무환경, 처우 등)


그래서 미련없이 패션을 지웠다. 대신 내가 좋아했던 요소인 '빠른 템포의 산업', 'B2B'라는 키워드를 일단 남겼다. 좋아하는 패션은 일로 하는 게 아니라 취미로 남겨두고, 다른 일로 돈을 많이 벌어서 패션을 소비해야겠다고 위로했다.




그렇게 선택한 게 테크업계였다. 미국에 2년 동안 지내면서 보고 배운게 컸다. IT, 테크 업계에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여기다..!'하며 캐치한 포인트가 있었다. 삶의 질과 업무 효율을 향상시켜주는 IT 기술, 매일 빠르게 변하고 새로운 트렌드가 끊임없이 나오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 일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좋은 업계인 것 같았다. 나는 지난 경험이 업계 사람 때문에 매우 힘들었기에, 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유해한 환경에서 나는 버틸 수 있는 강한 멘탈의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 내가 살 수 있는 환경을 찾아야 했다.


그 후,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강남 코딩 학원 6개월 과정에 등록하고, 코딩 언어(SQL, R, Python)를 배워 데이터 분석가로서 테크 업계의 커리어를 준비하게 된다. (중략)


돌이켜보면, 나는 진로설계를 스스로 직접 부딪혀가며 해온 것 같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거기에서 온 뼈아픈 고통과 실패들도 내가 이 다음 선택을 더 잘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껴안았다. 그래서 '~했었으면'하는 후회가 적다. 하고 싶은 것들을 먼저 도전해보고, 거기에서의 레슨런과 나의 장점과 약점을 파악해 내 장점을 더 잘 살릴 수 있는 곳으로 계속 움직이고 있다.


어려서부터 워낙 남 말을 잘 안듣고, 똥인지 된장인지 직접 찍어먹어봐야 아는 스타일이라 시행착오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지만, 매 순간과 과정에서 진심으로 느끼고 배우고 있다.


미국 패션박람회 뛰어다니던 체력으로 현재는 테크 박람회 뛰어다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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