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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Sep 03. 2023

하얀 비석들의 도시

콘크리트유토피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얀 비석들의 도시]

언젠가, 비행기 창문 너머로 점점 멀어지는 도시를 바라보면서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파트를 하염없이 쳐다본 적이 있다. 땅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것들은 하얗게 변하더니 이내 대부분의 땅이 아파트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메모장을 꺼내 ‘하얀 비석들의 도시’라고 적어두었다. 비행기가 구름에 가려지기 전, 도시의 부분 부분에 수 놓인 녹색의 산들과 끝없이 흘러가는 강줄기가 보이지 않았다면 그 하얀 비석들의 도시가 너무도 처량해 보였을 것이다.


[Hopeless]

많은 재난영화가 그 당시의 파멸적인 상황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그러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인물들의 영웅적인 서사와 긴장감을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렇지 않다. 도시가 폐허가 되어버린 이유는 좀처럼 알 수가 없고 ‘구조’라는 희망의 씨앗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미 도시는 기능하지 않고 생존자들은 그 안에서 그저 살아남아야 한다. 자, 재난의 이유도 알 수 없고 그 범위도 알 수 없으며 그 누구도 생존자들을 구할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온전히 사람만이 보인다. 아파트가 만들어낸 사회구조와 사람들의 이상과 현실, 그리고 파멸하는 개인과 결국 다시 일어나는 공동체만이 보인다.


[벗겨진 가면, 일그러진 공동체]

완벽한 절망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둘씩 가면을 벗는다. 민낯을 드러낸 사람들을 유심히 지켜보니, 어느새 다수의 현실주의자와 소수의 이상주의자가 구분되기 시작한다. 현실과 이기주의, 개인성이 응집된 표면적인 집단이 생존이라는 명목하에 아파트를 지배하고 이상과 이타주의, 공동체의 삶이 응집된 감추어진 개인이 다수의 ‘일그러진 공동체’에 의해 어딘가에 숨고 쫓기고 이내 들키게 된다. (일그러진 공동체:특정 개인들이 모여서 형성된 공동체, 다른 공동체와 비교되고 점점 내향적, 이기적으로 변해가는 공동체, 개인의 특성이 말소되고 편파적인 공동의 목적을 지닌 특정한 집단이 선택의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공동체)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을 저울질했다. 나라면 어땠을까 하며 비교해보기도 했다. 내쫓겨지는 다른 아파트주민들을 보면서 일그러진 공동체의 편향된 결정에 마음이 쓰리기도 했지만 죽음과 삶의 지독한 경계에서 개인의 무책임한 선의가 한없이 작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일그러진 공동체는 그들이 행한 행동의 대가를 치른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싸운다. 아파트, 그 전장 속에서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상을 버리지 못한 이들은 삶을 포기하거나 그 이기적인 전장에서 도망친다.


[누워버린 아파트]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그 하얀 비석이 온갖 비명과 복수심으로 뒤덮일 때, 그곳을 빠져나온 사람은 이상과 현실사이에서 흔들리던 남편을 잃는다. 이상을 버리지 못한 그녀의 현실이 그렇게 부서져가는 줄 알았지만 그 일그러진 공동체의 바깥에는 또 다른 공동체가 자라나고 있었다. 차가운 현실의 곁에서 얼어붙을 것만 같던 그녀의 손에 따뜻한 주먹밥이 쥐어졌다. 완전히 누워버린 아파트, 그리고 그 안에서 뒤집혀진 집들이 저기 저 꼿꼿하게 날이 선 아파트보다 왠지 모르게 따뜻하다. 아파트가 비로소 땅에 닿아서야 온전한 공동체가 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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