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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Sep 24. 2023

4월 15일의 비밀

보이지 않는 집 - 백희성


글을 쓰고 제목을 되뇌였다. 보이지 않는 집, 좀 더 풀어쓰자면 아나톨 가르니아를 위한 보이지 않아도 되는 집.


책에 정말 쉽게 빠져들었다. 나도 책에 이만큼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새삼 놀라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쓰쿠루와 그가 순례가 떠난 해’와 양귀자의 ‘모순’ 이후로 소설 속 배경에 한껏 몰입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


주인공인 루미에르는 건축가다. 그의 시선은 공간을 따라 자유롭게 유랑하고 나의 시선 또한 그와 함께 움직이는 듯했다. 소설 속의 주요 배경인 수도원의 모습을 한 병원과 파리 시떼섬의 오래된 3층집의 수많은 의문과 공간적인 특징들은 나로 하여금 페이지를 넘기고 또 넘기게 하였다. 모든 이야기는 4월 15일에서 그 첫걸음을 떼어낸다. 누군가의 시간은 4월 15일에서 과거로 흘러가고 또 다른 누군가의 시간은 4월 15일에서 그저 흘러간다. 그리고 루미에르는 4월 15일의 비밀을 파헤친다. 궁금증들이 하나씩 해소되어 가면서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공간적인 요소들이 마치 내가 벽을 만지는 듯한, 창문 밖에서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으로 다가온다. 그것들은 내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공간들과는 다소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줄거리를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의 발걸음과 상상, 그리고 놀라움이 이미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장에 급하게 적어두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써보려 한다.


1 나를 위한 건축

건물을 다 짓고 나서 열쇠를 주고 나오는 건축가, 남을 위한 건축이 그것이고 그것은 모순덩어리다. 나를 위한 건축은 뭘까, 하고 생각하다 보니 당장은 좋은 공간의 존재와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건축을 하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위한 건축을 할 때, 나에게서 나온 공간을 삽입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남을 위하면서 나를 위한 건축을 하는 방법이 아닐까. 나 자신이 그려낸 나의 집을 가지는 것만이 나를 위한 건축이 아니라 나에게서 이식된 공간을 만들고 그것에 다른 이의 추억이 쌓여가는 것이 결국 나를 위한 건축이 아닐까.


2 평범하지 않은 문

요즘에는 문이 대량생산되어 같은 형태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과거의 문은 세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그 집의 얼굴이었다. 문과 유리, 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부드러운 곡선을 지닌 창살, 그리고 문 주변의 뿌연 먼지를 상상해 보니 이것과 똑같은 문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같은 문을 열고 닫는다. 적당한 크기의 직사각형에 손잡이가 달려있는, 그것의 장식은 수없이 많더라도 ‘문’의 기본적인 성질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왜 그래야만 할까, 각자에게 필요한 문이 있을 텐데 말이다.(차를 다 마시고 남은 찻잎을 문에 설치된 쇠통에 넣어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그 향기가 퍼지는 프랑스와의 문이 떠오른다.)


4 자연의 나팔관

바람길이나 물길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옮겨주는 길도 있다. 병원 사람들이 자연의 나팔관, 자연의 통로라고 부르는 사람이 지나갈 수조차 없는 좁은 복도는 사람을 제외한 모든 것을 건축 내부로 끌어들이고 있다. 얇게 새어 들어오는 빛과 바람,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상상하면 그저 건축의 물리적인 하나의 요소일 뿐이었던 복도공간이 아주 특별해진다. 자연으로 충만한 그런 공간이 된다.


5 빛과 먼지

얇은 빛기둥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공간 안에서 먼지는 더 이상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건축재료가 된다. 먼지는 그저 단순한 먼지였지만 빛을 먹는 순간 빛의 비행을 하는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빛은 세상의 모든 것을 깨우는 존재였다. p.109


‘재료’의 범위를 넓혀보자.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의 재료들 말고도 빛의 질감을 느끼게 하는 먼지와 공간을 감싸는 향기, 빗방울에 부딪혀서 울려 퍼지는 나무실로폰의 맑은 소리, 흔들의자의 삐걱이는 소리와 바닥에 생겨난 자국, 홈이 파진 벽을 따라서 생긴 손 때 묻은 얼룩들은 더 이상 일회성의 요소들이 아니다. 공간을 채우는 또 다른 재료들이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지는 않지만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그리고 살아가다 보면 덧씌워지는 그런 재료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6 역사의 적층(솔직함)

완벽히 재현하는 것과 다름을 인정하는 것. 과거에 썼던 재료를 그대로 사용하여 과거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것은 그저 덮어쓰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과거의 것과 다른 것을 사용하여 서로 다른 시간대를 인정하고 보여주는 것, 그것이 올바른 역사의 적층이 아닐까. 과거에서부터 이어져온 역사가 어느 사건으로 인해 일부 지워졌고 자신이 그 부분을 새로 채워 넣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것, 그것이 솔직한 역사의 적층이 아닐까 생각한다.


8 과거로 가는 일기

현재에서부터 과거로 이어지는 일기장, 맞닥뜨려버린 사건과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이 그녀의 일기장으로 하여금 과거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게 하였다. 일기를 걸어갈수록 그녀는 모두가 살아있는 그 과거에 도착했겠지.


10-1 슬픔 가득한 어둠

밤마다 눈물을 흘리는 내게 낮과 밤을 구분하는 눈을 가져가셨으니까, 이제 나에게는 슬픔 가득한 어둠뿐이다. p.261


밤, 그 어둠에서 나를 가라앉지 못하게 하는 것은 빛뿐이다. 방안을 감싸는 주황색 조명이 꺼지면 잠에 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인다. 결국 그렇게 잠든 나는 얼마 못 가 짙은 어둠이 답답하여 그 안에서 깨어 나오고 만다. 그리고는 작은 불빛을 머리맡에 둔다. 난 그 지독한 어둠이 싫다.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는, 그것을 상상하게 하는 그 어둠이 싫다.


10-2 레널드와 허브

현관부터 계단까지 전부 흙바닥으로 되어있다. 아마 잔디나 풀이 심어져 있었겠지. 왈쳐요양병원에서와 마찬가지로. 도시에서 문이라는 아주 얇은 경계를 지나자 자연적인 공간이 발에 닿는다. 도시와는 전혀 다른 냄새와 색채가 눈앞에 펼쳐지고 그것이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도시를 걷다 보면 벽돌로 켜켜이 쌓여진 대문들이 쉽게 눈에 띈다. 갑자기 그것이 아주 작은 축복처럼 느껴졌다. 집이라는 공간에 들어갈 때 마주하는 땅과 하늘, 그리고 그곳에 심겨진 향기로운 식물들이 삶과 삶의 사이에서 완충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렇지 못한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도시에서 그저 뚝 떨어진다.


13 조금 부족한 공간

건축가가 조금 부족한 공간을 만들면 거기 사는 사람이 나머지를 추억과 사랑으로 채운다. 조금 부족한 공간에 대해서는 아직 잘 와닿지는 않는다. 도시로 일부 열려있는 마당과 같은 불완전한 공간의 요소들은 오히려 충만함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공간을 자신들의 이야기로 채울 수 있는, 오히려 가득 채워지지 않은 공간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의문이다.


14 흔적이 남는 것

사람의 추억과 사랑이 담기고 흔적이 남는 것이 바로 집이다. 흔적, 그것은 이야기 속에서 작은 홈을 따라서 생긴 손 때, 흔들의자가 몇 번이고 지나감으로 인해 생긴 두줄의 자국과 같은 것으로 묘사된다.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 아니라 사용자의 행위로 인해 생겨난 흔적, 그것은 고유한 집의 특성이 된다. 거의 유사한 집이어도 결국 흔적에 따라서 전혀 다른 집이 된다.


15

세상의 모든 불편해 보이고 부족한 것들은 어찌 보면 깊은 사연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음표를 만드는 요소들이 공간 곳곳에 숨어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유심히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의 의미를 잊지 말고 상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간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책을 덮은 이후에도 왠지 모르게 잔디를 밟고 있는 듯하고 허브향이 나는 것 같기도, 삐걱이는 흔들의자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집에서는 모든 감각이 열린다.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편안함 속에서 귓바퀴와 콧잔등 그리고 살갗에 내가 감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닿는다. 그것이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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