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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Oct 22. 2023

벽 너머로의 여행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 무라카미 하루키


[희한하게 책을 읽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은 다소 특이하게 읽었다. 이야기는 총 70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야기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하고 한 세계에서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뜨리기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내가 마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짧은 글을 적어두었다. 대부분은 이야기의 요약에 가까웠지만 어떤 것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쓴 일기 같았고 또 어떤 것은 나의 입장에서 쓴 일기 같았다. 내가 쓴 이야기들만 골라서 읽어보니 중간중간 남겨두고 싶은 글들이 보인다.


19

고독해졌다. 너는 사라졌고 나는 방황한다. 어두운 계단을 끊임없이 내려간다. 나를 짓누르는 밀도와 중력이 무슨 의미인가. 기껏해야 공기일 뿐인데. 나는 빛이 닿지 않는 이 계단 속에서 너를 기다린다.


44

‘무’가 보편성이고 ‘인간’이 특이성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무로 돌아가는 것은 힘차게 돌아가던 팽이가 쓰러지는 것과 같다. 그렇다. 팽이는 원래 스스로 회전하지 않는다.


52

커피숍을 나가기 전에, 아주 잠깐의 망설임이 나를 붙잡았다. 그 순간 아마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고 그 짧은 찰나에 나는 마음을 붙잡았다. 이내 뒤를 돌았고 나는 그녀에게 식사를 권했다. 그 짧은 망설임, 마치 라이터에 불을 붙일 때 튀기던 그 불꽃의 부스러기 같은 마음이 사랑을 시작케 한다. 그 부스러기가.


58

무한했던 시간이 점차 유한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간이 나를 지나갈수록.


[불현듯 떠오르는 현상들]

이 책은 내가 혼자 느끼는 줄만 알았던, 혹은 너무도 무심히 지나쳤던 어떤 현상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 망각되어지는 아침의 꿈, 나를 괴롭히던 그 어둠 속의 아지랑이들, 그리고 한껏 무거워진 지금의 시간까지.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

그림자와 나는 하나다. 언제나 그래왔다.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그것은 나의 행동 대부분을 따라 하고는 딸깍, 하고 모든 불이 꺼진 밤에는 말도 없이 사라진다. 시커먼 어둠이 차지해 버린 방안이 소름 끼쳐서 항상 재빨리 눈을 감는다. 새벽의 한 중간즈음, 잠에서 깬다. 분명 보이진 않지만 그림자도 잠에서 깨어났을 것이다. 그 소름 끼치는 어둠에 잠식당할까 봐 머리맡의 조그만 조명을 켠다. 그렇게 그림자가 다시 내 곁에서 희미하게 일렁인다. 그림자는 내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이 조그마한 글을 적는다. 항상 곁에 있어서 그 존재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내가 잠든 그 순간에 어디론가 사라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깊은 어둠 속으로 말이다. 그래서일까, 불빛하나 없는 어둠에 놓이면 정말 혼자가 된 느낌이다.


-아침의 꿈

망각되어지는 아침의 꿈, 얼마나 많은 꿈이 꾸어지고 사라졌을까. 나도 꿈읽는이다. 내 안의 열망 같은 것이 꿈으로 변환되어 나의 안에서 상영된다. 나는 그것을 꿈으로 인해 그 열망을 잠재운다. 그리고 그것은 쉬이 잊힌다. 마치 고의적으로 삭제되어지는 것처럼 소멸한다. 항상 궁금했다. 실제 세계에서 눈을 뜨면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그것들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고 그것들은 어찌하여 그렇게 쉬이 사라지는지. 어쩌면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의 오래된 꿈들이 터져 나오지 않게 그 꿈들을 하나하나 읽는 것처럼 나의 꿈 역시 나의 밖으로 분출되지 않게, 내가 나의 통제력을 잃어버리는 그 밤에 그것들을 하나하나 꺼내놓는 것일 수도.


-어둠 속의 아지랑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져 가는 갖가지 무늬, 거의 대부분 사라지지 않는, 반복재생되는 비디오 같은 아지랑이들. 어릴 적 나의 밤을 괴롭히던 것들 중 하나였다. 눈을 감으면 나타나는 그 무지개 빛깔의 일렁이는 무늬들이 계속 눈앞을 어지럽혀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사실 요즘에는 그것을 본 적이 없다. 본 적이 없다기보다는 무관심해졌다고나 할까. 하지만 어렸을 적, 눈만 감으면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것들이 어찌나 성가시던지 책의 일부에서 그 아지랑이들을 발견하자마자 그 순간이 바로 떠올랐다. 그 어떤 이야기에도 오르내리지 않았던 그 아지랑이에 대한 경험을 드디어 풀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무거워진 시간

분명 책 속에는 시간의 유한함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왠지 나는 그것이 무거워졌다고 표현하고 싶다. 시간이라는 중력이 나를 짓누르는 힘이 좀 더 커졌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의 시간은 확실히 가벼웠다. 너무도 가벼워서 그것의 의미를 쉽게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어깨에 소복이 쌓인 눈의 무게를 쉽게 알아차릴 수 없듯이. 하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고서야 그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남은 시간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하자 시간은 드디어 유한해졌고 나를 괴롭힌다. 지붕 위에 가득 쌓인 눈이 집을 위협하는 것처럼.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작가가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그 불확실한 벽을 깊고 연속적인 의심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면 나에게는 성공했다. 책을 읽는 내내 대체 어떤 세계가 진짜 세계인지, 혹은 가짜 세계인지 헷갈렸다. 아니, 두 세계 모두 진짜가 될 수도 있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이토록 불확실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새로웠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이 현실과 비현실을 아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두 세계 사이에 있는 벽이 너무나 높고 단단하여 자신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세계 너머의 것을 당연히 거짓이라고, 그저 상상 속의 물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책 속의 도시들은 쉽게 현실과 비현실로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 처음에는 나와 그녀가 존재하는 현실을 기반으로 하여 벽으로 둘러싸인 그 상상 속의 도시를 비현실로 가정해 두고 이야기를 살펴나갔다. 비현실의 세계니까 시계는 시곗바늘이 없고 사람은 그림자가 없고 도시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을 수 있다.


글을 쓰다 보니 좀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관계가 정리되지 않는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1

내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도시가 그녀에게는 그저 자신의 그림자가 살고 있는 비현실의 세계였고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에 진짜 그녀가 살고 있다(진짜 그녀가 살고 있으니까 그 도시가 진짜 현실일까). 자신을 그림자라고 생각했던 그녀가 현실에서 사라지고 ‘나’는 그 비현실의 세계로 흘러들어 가서 진짜 그녀를 만난다.(여기까지, 내가 있던 도시는 나에게는 현실이고 그녀에게는 비현실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는 나에게는 비현실이고 그녀에게는 현실이다.)


2

나는 사라져 가는 자신의 그림자를 그 비현실의 세계에서 빠져나가게 한다. 그렇게 현실세계로 돌아온 ‘나’의 그림자는 자신이 그림자인지도 모른 채로 자신이 현실이라고 자각하는 도시를 살아간다. (여기까지, 내가 있던 도시는 자신이 그림자라고 자각하지 못하는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고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는 내가 현실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현실이다.)


3

새로운 지역의 도서관장으로 취임한 나(그림자)는 그곳에서 그림자도, 시계의 시곗바늘도 없는 고야스 씨를 만난다.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고야스 씨를 만나자, 나의 세계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그렇게 내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비현실의 특성을 지니기 시작한다.(여기까지, 내가 있던 도시가 비현실적인 요소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진짜 ‘나’가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로 넘어갔기 때문일까,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진짜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그 도시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4

하지만 두 세계 모두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나타난다. 그는 모든 책을 읽고 외우는 자신의 능력을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에서 활용하고 싶어 한다. 그렇게 그는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의 나를 이 세계로 돌려보낸다. ‘나’는 현실에서의 나로 살아가고 있는 그림자와 합쳐지고 요트파카를 입은 그 소년이 그 도시에서 나의 역할을 대신한다. (여기까지, 내가 있던 도시의 비현실적인 것들(그녀의 그림자, 고야스 씨)이 사라지고 진짜 ‘나’가 남았다. 그리고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에는 진짜 그녀와 그 도시 역시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남았다.)


두 도시를 넘나들며 상상하다 보니 도시를 둘러싸는 벽도 없고 나의 그림자가 나와 함께 움직이는 이 도시도 현실이 되었고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그림자 없는 그 도시도 진짜 그녀와 요트파카 소년이 살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처음에는 벽으로 둘러싸인 그 도시를 완전한 상상의 도시, 비현실과 거짓의 도시, 상상 속의 도시라고 생각했지만 점차 그 도시 역시 현실이 되었다. 단단한 줄만 알았던 현실과 비현실을 나누는 그 경계는 확실히 불확실했고 처음에 생각했던 닫힌 생각은 무너져버렸다.  


정말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돌아보게 하였고 사랑의 시작, 그 자그마한 불꽃의 부스러기들을 돌아보게 하였다. 눈을 감으면 나를 괴롭히던 아지랑이를 떠올리게 하였고 이제는 유한해졌고 무거워진 시간을 직면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는 상상으로 떠날 수 있는 여행지 중 가장 먼 곳에 다녀왔다. 그 불확실한 벽 너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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