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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교생 Nov 21. 2022

대학원 첫 학기 후기

직장인의 파트석사, 생각보다 성공적

대학원 첫 학기가 거의 마무리되어 간다. 실제 출석 일수로 치면 며칠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많은 경험과 다양한 만남을 수 있었다. 대학원 첫 학기의 총평을 간략히 내리자면 다음과 같다.


왜 이제서야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을까?




8월 말, 학년실에 대학원을 시작한다고 알렸다. 학년부 업무가 열 명 남짓의 담임들이 1년짜리 일을 조금씩 도맡아 해 나가는 형식이다 보니 서로의 상황에 대한 안내와 이해가 필요했다. 처음 말을 꺼냈을 때, 다들 많은 염려를 보내왔다.


몸이 많이 고될 텐데, OO시로 옮기고 나서 시작하지 그랬어요.


4시 50분에 종례를 끝내고 편도로 80km를 달려 강의실로 간다. 주 중에 이틀 수업을 듣는데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가 조금 넘는다. 야자나 방과후는 별도다. 주에 사흘에서 나흘은 밤늦게서야 일정이 끝난다. 체력적으로 꽤나 힘에 부치는 일정이기는 했다. 그래도 학부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는 수업들이 재밌었고, 여전히 어설프지만 현장 교사라고 대우해주시며 나의 생각을 경청해주시는 교수님들이 좋았다.


지적인 갈증도 부족하지 않게 채울 수 있었다. 응용학문을 전공하는 사람 태생적으로 순수학문에 대한 동경을 품기 마련인데 이런 점에서도 꽤나 만족스러웠다. 학부 때 수업을 들으며, 임용시험이라는 제약 때문에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하는 것들을 볼 때마다 '차라리 국문과였다면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하며 아쉬워했던 부분에 대해서 마음껏 깊이 파볼 수 있었다. 유일한 제약이라면 그것들을 해낼 시간과 체력이 남아 있느냐의 문제였다. 이번 학기를 지내며 기억에 남는 것들은 다음과 같다.




1. 우리 대학원, 생각보다 잘 돌아가고 있었다.


솔직히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줄 알았다. 자대로 진학하면서도 지방의 대학원이니 외국인으로만 가득 차있고 학교로부터 아무런 지원이나 학회 참석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상은 예상보다 정말 잘 돌아가고 있었다. 총 9학점을 들었는데, 작게는 다섯에서 많게는 일곱 명의 원생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원생들은 주제에 따라 각자 논문을 요약해왔고 매일 두세 편을 리뷰하고 질의를 하는 방법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다. 현직 교사가 다섯 명에 시간강사가 한 명, 은퇴한 관료가 한 명에 풀타임이 한 명이었다.


전공 탓인지 원생의 절반 이상이 평균 10년 차 이상의 교사들이었다.(원생 중 내가 가장 어렸고, 가장 경력도 짧았다.) 초중고 교사가 모두 모여있다 보니 동일한 이론에 대한 적용방안이나 견해도 상이했다. 문식성 향상 방안을 주제로 가정 문식성에서의 간극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는 교육과정에서 문서로만 보던 초등 한글교육의 실태와 개선방안을 초등교사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었다. 2022개정을 앞두고 사라지는 '한 학기 한 권 읽기'에 대한 견해의 차이도 다양하게 들어볼 수 있었다. 여러 학술지에서도 같은 주제로 쓰인 여러 글들을 접할 수 있었지만, 그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사실 교사들도(내가 이리 모든 집단을 대변하는 것이 매우 부적절할 수도 있겠으나) 자신의 학교가 아니면 다른 학교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 '진리의 학교 바이 학교'라는 명언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교육부나 본청에서 사소한 정책 하나를 두고 끝없이 현장의 의견을 듣고자 하는데에는 그만큼 학교마다의 차이가 워낙 큰 탓이다. 그래서 성경의 글귀처럼 학교가 처한 상황에 따라 하나의 정책도 서로 다른 의미로 읽힌다. 이러다 보니 동일한 중등교사라고 하더라도 원생들의 근무지나 배경이 상이한 탓에, 토의 과정에서 고등학교에서만 있던 내가 바라보지 못하는 견해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런 토의 과정이 정말 재밌었다. 자신과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다. 녹초가 되어 강의실에 도착해도 수업만 시작되면 생기가 돌았다. 내가 너무나 우리 대학원에 대한 기대를 다 내려놓고 진학을 했던 탓일까, 매번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읽어가야 할 논문과 매주 쏟아지는 과제들을 해내기 위해서 거의 모든 공강 시간과 자유시간을 쏟아부어 한 학기를 보냈다.


그리고 다행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지도교수의 수업은 기대 이상으로 어려웠다. 지도교수는 출결이나 수업 방식 대해서는 원생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였으나, 수업의 수준과 질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았다. 국어학으로 전공을 결정한 다른 원생들 대부분은 지도교수의 수업을 따라가기 버거워했다. 전통 문법의 내용을 뒤엎는 것들이라 지금껏 배워온 문법의 가장 아랫부분부터 부정하며 시작해야 하는데, 쌓인 것이 많을수록 이 과정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관련 논문을 뒤적이고 더듬거리며 책을 읽어갈 때마다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분야가 제법 매력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제대로 개척되지 않은 곳임을 점차로 느낄 수 있었다. 교수가 아무리 자기 분야가 블루오션이라고 외치더라도 대학원생 본인이 느끼기 전까진 알 수가 없는 것인데, (아주 성급한 결론일 수 있겠으나) 이제는 조금 그것이 무슨 말인지 느껴지기 시작한다. 역시 직접 발을 담그기 전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 법이다.




2.  논문을 읽는 눈을 기르다.


제대로 논문을 읽는 법을 처음 배웠다. 그 전까지도 논문은 제법 읽었었다. 요즘 학교에서 생기부 작성 수준이 제법 올라가다 보니 교과세특을 매력적으로 적기 위해서는 학회에서 다뤄지는 키워드 정도는 알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RISS나 DBpia를 적당히 뒤적이는 정도를 넘어 주제별로 파급력이 센 논문을 선정하고, 한 편의 논문을 읽고 자신의 말로 바꾸어 다시 작성해보거나 이를 두고 교수와 함께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생각해보면 학부 수준의 수업에서는 권위 있는 책의 내용을 암송하는 것이 학습의 끝이었다. 잘 외우면 시험을 잘 볼 수 있었고,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임용시험이라고 크게 다를까, 논술형이나 서답형 시험도 정해진 틀을 빠르고 정확하게 읽어내서 알고 있는 바를 핵심어 위주로 나열하면 끝이다. 나의 생각이나 견해를 함부로 밝혔다간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충돌하는 견해들 사이에서 나의 생각을 정하고 그 근거를 밝히는 것을 요구받고 있다. 아무리 작은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적확한 출처를 바탕으로 그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내 생각으로 다른 원생과 교수들을 설득시켜야 했다. 예전 같으면 명문대 교수라는 이유만으로 특정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겠지만, 지금은 저자의 배경을 가리고 해당 주장의 타당도에만 집중하기 시작한다. 여러 학설들을 두고도 고전(classic)과 정전(canon)으로 각각을 구별하고, 유명세를 얻은 저술들이 진리를 말하는 것인지, 학계 내 이데올로기적 우위에 의해 힘을 얻은 것인지를 따져보게 된다. 이런 일련의 경험들은 '논문'이라는 형식의 글 읽기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본질적인 답이 되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시작했던 대학원에 이제는 제법 적응을 해가는 것 같다. 발표문과 소논문 사이의 무게를 가진 몇 편의 글도 썼는데 작성 과정이 제법 재밌어서 '이 길이 적성에 맞나?' 하는 그릇된 생각도 몇 번 했었다. 걱정이라면 졸업 논문의 주제를 아직 정확히 잡지 못한 것인데, 주변에서 2차수쯤에는 논문의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들 하여 조금씩 조바심을 느끼고 있다. 학위논문은 평생 따라다디는 꼬리표이니 대충 쓸 바에야 한 두 학기 졸업을 미루고 말겠단 생각이지만 이왕이면 제 때 졸업하고 싶을 뿐이다.


파트석사로 시작한 학위가 물석사로 끝맺지 않기 위해, 학부 때보다 더 지독하게 매달리고 있는데 끝이 어떨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 같다. 그래도 시작해서 실패한 것보단 하지 않은 것을 사람은 더 후회한다고 하지 않던가. 후회를 줄이는 선택이 현명한 선택이라면 지금 하는 것들이 최악은 아닐 거라는 자기 위안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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