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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 Apr 15. 2022

즐거운 최선

  “최근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을 느끼신 분?”  

  

 비폭력 대화 강의를 듣고 있는 동아리 멤버가 <감정 욕구 카드> 사용법을 공유하며 던진 질문에 손을 번쩍 들었다.


2018년 주말 부부 2년 차.

아이들 아빠가 집에 돌아오는 금요일에 학부모 동아리 모임까지 겹쳐 아침부터 바빴다. 설거지만 대충 끝내고 흩어진 옷가지며 빨래, 재활용 쓰레기로 어수선한 집을 그대로 두고 나오니 답답했다. 모임을 위해 회의실로 오는 내내 머릿속엔 해야 할 일들로 분주했다.


 카드를 쥔 멤버가 다가오고 모두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무슨 일로 힘드셨어요?”

 “정리 정돈이 힘들어요. 뒷목이 당기도록 종종 대며 정리하고 청소하는데 돌아서면 또 치울 거리가 있어요. 어디서 멈춰야 할지, 언제 끝날지. 막막한 마음에 화가 나요. 아이들에게 어지른 거 치우라고 소리치고 정리하는 손길이 거칠어지면 심장도 조여 오는 거 같아요. 청소하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듣고 있던 멤버가 감정 카드를 탁자에 펼쳐 놓는다.


 “제가 질문하면 떠오르는 감정 카드를 골라주세요.  일단, 끝날 것 같지 않은 청소를 하면서 어떤 감정을 느끼나요?”

 “피곤하고 답답해요.”

 “ 억울한 감정도 드나요?

 “네. 지긋지긋하고 귀찮기도 해요.”

 “혼자 많은 일을 하다 보면 서운하고 외로운 감정도 생기나요?”

 “맞아요. 울화가 치밀기도 해요.”    

 

 피곤한, 답답한, 억울한, 지긋지긋한, 귀찮은, 외로운, 울화가 치미는


 내 앞에 놓인 카드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정리 정돈과 청소를 하며 답답하고, 짜증 나고 억울하고 피곤한 내가 있다. 이 감정에 보태 나는 서운하고 외롭고 울화가 치미는 상태다. 집 안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정적 감정을 품고 생활하고 있는 내가 보여  ‘불행하려고 청소하는 건가?’ 나 자신에게 의문이 들었다.    


이번엔 욕구 카드를 펼쳐 놓는다. 멤버는 다시 질문하고 나는 카드를 고른다.


 “정리 정돈을 하면서 기대한 마음은 무엇일까요?”

 "친밀한 관계, 소통, 정서적 안정을 주는 공간을 기대하죠."

 “청소를 하면서 짜증 나고 억울한 감정이 든다고 했어요. 이럴 때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도움, 지지협력, 배려, 감사, 인정이요."


친밀한 관계, 소통, 정서적 인정, 도움, 지지협력, 배려, 감사


 눈앞에 펼쳐진 카드가 청소와 정리 정돈을 하며 기대하는 나의 욕구를 드러내고 있었다. 가족들이 친밀한 관계를 맺는 장소로, 정서적 안정을 주는 품으로, 그 속에서 서로 배려하며 감사를 나누는 관계를 기대했구나! 그러나 현실은 지쳐 화를 내고 고함치고 지시하고 투덜대고 있었다. 이상적인 행복을 꿈꾸지만 완전 엇박자로 가고 있는 내가 보여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자리에 있던 멤버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누구의 이야기랄 거 없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며 공감했다. 내친김에 엄마가 청소하며 화를 내고 있을 때 가족들의 감정이 어떤지도 헤아려보기로 했다. 감정 카드와 욕구 카드를 고르느라 동아리 팀원이 머리를 맞댔다.


 “엄마가 화를 내며 청소를 하고 있을 때 아빠와 아이들의 마음에서 어떤 감정이 생길까요?”

 “불안하고 불편할 거 같아요. 나는 다른 걸 하고 있는데 자유를 침해받는다는 속상함도 생길 거 같아요.”

 “또 어떤 감정이 생길까요?”

 “엄마가 예민하면 조마조마하고, 답답할 거 같아요.”  


 땡~

 머릿속에 종이 울렸다.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뒷목이 당기도록 청소를 했던 것일까! 특히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주말이면 세끼 식사에 밀린 빨래에 다섯 식구(고양이 나나 포함) 뒤치다꺼리에 더 극성스럽게 청소를 해대는 엄마를 보며 불편했을 가족들의 마음이 헤아려졌다. 그 와중에 도와주지 않는다고 심통 내고 수고로움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며 분통을 터뜨리던 내가 깨달아져 뜨끔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언제부턴가 이 생각이 마음에 있었나 보다. 누가 봐도 완벽한 상태로 마무리 짓는 것은 불가하더라도 그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고 최선이라 생각했다. 한창 아이들이 자라는 시기, 손이 많이 가는 시기에 끝나지 않을 집 안일들을 붙들고 끝나지 않는다고 투덜대며 미련을 떨었다. 어쩌면 몸도, 정신도 피폐해져 불행을 향해가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지극히 개인적인 최선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집의 일원이며 엄마 역할을 하는 나는 집이 나 혼자의 노력으로 가꾸어지는 공간이 아님을 받아들인다. 가족이 함께 생활하며 어질러지는 당연함을 인정한다. 즐거울 만큼 청소하고, 음식을 만든다. 항상 깔끔하지 않아도, 소박한 밥상이어도  가족들은 불편해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료만 사다 놓으면 아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준비하기도 하고, 남편이 틈틈이 설거지를 도왔다. 막내딸이 빨래를 널고 개키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하고 싶을 때 하도록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겨두니 때론 폭격 맞은 집이 어수선하기도 했지만 우리 가족은 엄마인 나를 이해해주려 노력하고, 지저분한 걸 보아 낼 수 있는 여유와 자유도 얻었다.


호기심이 생기는 강좌를 찾아 듣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여유가 생긴 요즘.

나는 즐거운 최선을 산다.         




몇 년 전에 썼던 글을 읽었다. 그땐 정말 뭘 먹지 않아도 속이 더부룩하고 머릿속은 분주하고 심장 박동은 언제나 빨랐다. 애써 숨 쉴 틈을 찾아 기웃거리며 그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고 조금 더 나아지기 위해 고민했었다. 지금은 한 아이를 독립시키고 한 두 평이라도 더 넓은 집, 성능 좋은 가전들이 나의 일을 도와준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여유가 생긴 듯하다. 대신, 고정적으로 먹는 약이 두 알 생겼고, 얼굴엔 기미, 푸석해진 머리엔 새치가 자리 잡았다.  


벚꽃이 하얗게 떨어지는 길을 걸으며,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낄 새도 없이 이 봄이 지나가고 있음에 놀란다. 내 의식보다 앞서 가는 시간에  초조해지는 나를 본다. 무엇을 위해 즐거운 최선을 살아야 할지 예전과 다른 고르기가 필요한 시점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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