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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시 Jun 29. 2024

낭만적인 마지막 말 '떡볶이 좀 그만 먹어'

<시장 떡볶이>

 

'떡볶이 1인분이요'하면, TV를 보던 사장님이 천천히 일어나 프로페셔널한 무표정으로 국자도 주걱도 아닌 하이브리드 집기를 이용해 무심하게 퍽퍽 두 번 퍼주시던 뜨끈한 떡볶이. 이어서 군더더기 하나 없는 빠르고 능숙한 동작으로 봉지 끝을 돌돌 말아 쫌매 까만 봉투에 넣어주시던 시장표 떡볶이. 넓고 긴 직사각형 철판에서 용암처럼 끓던 시뻘건 국물은 고춧가루 입자가 느껴질 만큼 텁텁하고 걸쭉한 식감에 깊이도 감칠맛도 없이, 맛이라곤 딱 단맛과 매운맛만 났다. 솔직히 싸구려 맛이랄까. 하지만 그 두 맛의 조화가 엄청 절묘해서, 떡으로 쓸어 남김없이 싹싹 훑어 먹게 되던 마성의 매력을 잊을 수가 없다. 떡은 또 얼마나 푹 끓인 건지 웬만해선 불지 않는 밀떡인데도 탄성을 잃고 물렁물렁하게 퍼진 게 특징이었다. 불다 못해 질척해진 떡을 씹으면 어금니에 붙어 짭짭 소리가 나던 것 또한 나름의 재미였다. 새끼손가락만큼 얇게 썬 어묵은 꾸덕한 국물 속을 이쑤시개로 휘저어 찾아야 겨우 두 조각 발견할 수 있었다. 가끔 세 조각이 나오면, 그날은 완전 횡재한 날!

1인분에 단 삼천 원. 대학 시절 나의 주식이었다.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 많으면 일주일에 다섯 번도 먹었다. 내 평생 가장 많이 먹은 음식을 꼽으라면 단연코 떡볶이일 것이다.

 

 

"알시야, 너는 죽기 전에 마지막 한 끼로 뭘 먹을 거야?"

 

이건 내 친구가 나를 놀릴 때 쓰는 단골 멘트다. 듣고 싶은 대답이 명확히 정해진 유도성 질문. 내가 지겨운 표정을 지으면 그녀는 더욱 신이 나서 내 대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떡볶이지? 떡볶이 먹을 거지?"

 

하며 스스로 답해버리고 와하하 웃곤 한다. 그러면 나는 볼멘소리로 항변한다. 아 그거, 웃긴 게 아니라 슬픈 얘기라고!

 

한국인 중에 떡볶이가 '소울푸드'인 사람은 나 말고도 엄청 많을 텐데, 유독 나는 떡볶이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당한다. 그 이유는, 대학 시절 내 첫 번째 연인이었던 '물소'와 헤어지고 친구와 술을 마시던 날 내가 고백했기 때문이다. 물소의 마지막 말이 '떡볶이 좀 그만 먹어'였다는 것을.

 



물소는 참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주절주절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말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맞는 단어나 문장을 잘 못 찾는 편이었다. '거 있잖아, 그 알지?'하는 식으로 뭉개며 과정에 대한 설명은 전부 생략한 채 시작과 끝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테면,

 

 

물소가 나의 자취방에 놀러 온 날이었다. 함께 먹은 배달 음식을 물소가 치워주다가 싱크대 선반과 냉장고 사이 틈새로 떨어진, 말라붙어가고 있는 음식물 조각을 발견해냈다. 물소는 냉장고를 밀어내고 떨어진 음식물을 치워주며 말했다.

 

"이런 거 잘 버려. 너 감기 걸려."

 

나는 일단 알았다고 대답했지만 '음식물'과 '감기'에 대한 상관관계를 한참 고민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이유를 꼬집어 묻자 물소는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면역력 떨어져, 음식 썩고 그러면. 너 자꾸 감기 걸리고."

 

내가 눈치껏 짜 맞춘 물소의 이야기는 이랬다. 집에 음식물을 썩히며 방치한다든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지내면 면역력이 떨어질 수 있으니 원래도 감기에 잘 걸리는 나는 청소를 더욱 열심히 하며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차마 발견하지 못해 말라비틀어진 작은 음식 조각 하나가 그 정도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는 따져 묻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 너무 세심한 연인이 아닌가?

 

 

어느 날은 물소가 대뜸 빈 물통을 내게 들이밀며 본인의 솥뚜껑만 한 주먹을 입구에 대고 손이 들어가지 않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자기야 난 안 들어가는데, 손 들어가?"

 

나는 손을 쏙 넣어 보여주었다. 물소는 흡족하게 웃더니 박수 치며 말했다.

 

"와~ 자기 손 작아서 좋다! 앞으로 너 시켜야지~"

 

사각기둥 형태의 물통 바닥 코너에 덜 닦인 물때가 끼어있었다. 자기는 손이 닿지 않아 닦을 수 없으니 물통에 손이 들어가는 내게 종종 닦아달라 부탁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때 사용하라고 길쭉한 설거지 솔이 있다는 사실은 굳이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물통을 씻을 방법을 찾아내, 기쁨에 덩실거리는 물소를 보며 나도 그냥 같이 덩실거렸다.

세상에, 너무 귀여운 연인이 아닌가?


이렇게 나는 눈치코치로 물소가 생략한 말들을 상상해 내 전체 맥락을 대충 예상하여 이해하는 능력을 단련했다.

 

 

이별하던 날, 물소와 나는 카페에서 만나 꽤 긴 대화를 나눈 끝에 헤어졌다. 첫 연애였기에 이별 또한 처음이었던 나는, 한참 얘기했어도 정작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은 전부 전하지 못했다. 미리 마음의 준비는 하고 갔지만 모든 게 생각보다 정신없이 급하게 흘러갔고, 영 이별이 실감 나지 않았다.

이렇게 헤어지는 게 맞나? 그래도 함께 한 시간과 의리가 있는데. 이렇게 얼렁뚱땅 끝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집에 돌아온 나는 아주 정성스레 장문의 문자를 썼다. 우리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온갖 고마운 기억과 미안한 기억을 끄집어내 죽 나열하고 감사 및 사과 퍼레이드를 펼쳤다. 썼다 지웠다, 뺐다 넣었다 반복하며 더 매끄럽고 아름다운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애썼다. 덕분에 문자는 감성 넘치는 캄캄한 새벽에서야 보낼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물소에게 답장이 도착해 있었다. 그 또한 나처럼 감사함과 미안함을 꽉꽉 채운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여러 줄의 미안해와 고마워를 거쳐 마지막 문장은 [떡볶이 좀 그만 먹고.]였다. 그 마지막 문장에 나는 마음이 먹먹해졌다. 긴 세월 제멋대로 생략된 '물소'의 말들을 눈치로 때려 맞추며 지내 온 나는 숨겨진 그의 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매일 저녁, 통화 중에 그가 '오늘은 뭐 먹었어?' 물으면 나는 이틀에 한 번꼴로 '시장 떡볶이'라고 답했다. 그러면 그는 한껏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에이, 몸에 좋은 거 좀 먹지~'했다. 문자 마지막 줄을 읽을 때, 그 '몸에 좋은 거 좀 먹지'하던 물소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세상에, 너무 낭만적인 마지막이 아닌가?

 

 

"뭐? 푸하하! 야, 네가 얼마나 떡볶이를 먹어댔으면 헤어지는 데 그런 소리를 하냐? 어지간히 질렸나 보다!"

 

내 촉촉한 감성을 장창 깨버린 건 경박스러운 친구의 웃음소리였다. 아니, 웃기다니 이게? 예상치 못한 반응에 깜짝 놀란 나는 마시던 술잔도 딱 내려놓았다. 친구는 내가 웃기려고 한 말인 줄 아는지 목청 높여 깔깔 웃어댔다. 이게 남들에겐 좀 웃기게 들리는구나, 그전까진 생각도 못 했던 바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 슬픔도 잊었다.

"아니, 몸에 안 좋으니까 좀 덜 먹고,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한 말이야!"

 

"야아, 네가 어떻게 알아~ 헤어지면서 하는 말이면 '너 때문에 떡볶이는 아주 질려버렸다가 더 맞겠구만!"

 

친구도 진심은 아니었겠지만 끈질기게 짓궂은 소리를 했다. 졸지에 나는 떡볶이 때문에 헤어진 여자가 되었다. 억울했지만 그냥 같이 웃어주고 말았다. 모처럼 친구와 한잔 하는 자리에서 자꾸 슬픈 얘기를 하기도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웃긴다고 와하하 다 웃어버린 다음에 이미 망해버린 공감을 계속 구걸하기도 민망했다. 그래, 너는 우리끼리의 사연은 모르지 뭐, 하고 말았다. 어차피 슬픔도 추억도 다 내 몫일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십 년 넘게 떡볶이로 놀림을 당할 줄 알았다면, 그때 절대 웃어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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