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페, 그 아름답고 경이로운 세계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의 환희란!
탕수육, 폭립, 치킨, 피자, 파스타, 갈비찜, 각종 튀김, 국수, 볶음밥, 케이크, 초밥, 스테이크. 특별한 날에나 먹을 별식들이 한날 한자리에 줄지어 놓여있고, 윤기 나고 따끈한 최적의 상태로 유지되며, 끊임없이 무한 리필 되어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계속 가져다 먹을 수 있는, 그야말로 행복한 시스템.
뷔페를 처음 접했던 초딩 꼬꼬마는 눈앞에 펼쳐진 신세계에 작은 배가 원망스러울 만큼 흥분했다.
'와, 여기 일주일에 한 번씩 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뷔페는 어른이 데리고 와주어야 올 수 있는 '비싼 식당'이었고, 식탐 없는 우리 집 어른들은 '쓸데없이 가짓수만 많다'며 뷔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당시 용돈도 따로 받지 않았던 나는 혼자서 뷔페에 오겠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아니, 돈이 있었어도 그런 '부내'나는 공간에 혼자서 들어갈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어른이 되면’ 꼭 다시 오겠다고 다짐하며 뷔페와의 기약 없는 만남을 애틋하게 기다렸다.
뷔페와 나의 운명적인 재회는 '어른'이 된 21살, 백화점 지하상가에서 이루어졌다.
대학 기숙사 룸메이트 사이였던 '코알라'와 나는 공강 시간마다 학교 옆 백화점에 들르기를 즐겼다. 우리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던 우리만의 방앗간은 여성복매장이 입점한 3층과 4층, 5층이었는데, 가난한 대학생이 매번 옷을 살 수는 없었고 그저 아이쇼핑만 했다. 눈으로 그 아름다움을 한참 좇다가 빈손으로 돌아서면 헛헛함을 달래기 위해 백화점 지하에 연결된 근처 대형마트에 들러 약간의 간식거리를 사 갔다. 우리만의 쇼핑 루틴이었다. 그렇게 또 마트를 향하던 어느 날, 코알라가 말했다.
"언니, 우리 언젠가 저기 가보지 않을래?"
코알라가 턱짓으로 슥 가리킨 곳은 백화점 출구와 마주 보고 있는 입구 기둥의 흰 폴리싱타일이 번쩍대는 아주 비싸 보이는 식당이었다. 뭐 파는 데냐, 곁눈질로 훑으며 묻자 코알라가 깜짝 놀라며 답했다.
"언니! 뷔페잖아, 몰랐어?"
"뷔페?!!"
아니, 뷔페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어쩜 이런 운명 같은 만남이! 마치 옛날의 다짐을 까맣게 잊고 사는 내가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곁에서 기다려 준 것 같았다.
"야. 당장 가자, 당장! 내일! 바로!"
"언니, 언니 진정해 봐."
제가 가자고 해놓고 나를 말리는 코알라가 하는 말은 이랬다, 본인도 가보고 싶긴 했지만 앞을 지날 때마다 보면 늘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즉, 맛집이 아닐 가능성이 있으니 혹시 맛이 없더라도 자신을 탓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투명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식당 내부가 휑했다. 바깥 라운지에는 웨이팅 손님을 위한 대기 의자가 죽 늘어서 있었는데, 안쓰러울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의자만큼의 인원을 기대했지만, 손님들에게 차갑게 외면받은 것 같은 광경이라 보는 내가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둔한 입맛의 소유자, '막입'이니까. 뷔페님을 영접했는데, 뭐든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다. 나는 불안해하는 코알라에게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며칠 후, 잘 늘어나는 고무줄 바지와 배를 가려줄 오버핏 상의로 전투태세를 갖춘 우리는 비장한 표정으로 뷔페에 들어섰다. 나는 음식을 닥치는 대로 말살해 버리겠다는 살벌한 각오를 다졌다. 음식을 담으러 가는 걸음이 위풍당당했다.
대망의 1차전, 적진을 탐색하는 마음으로 샐러드 코너에서 각종 풀떼기를 담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원래 코스요리를 먹을 땐 에피타이저로 샐러드를 주지 않던가. 하지만 영 손이 가지 않았는데, 마침 샐러드 코너 한구석에 빨갛게 비빈 소면이 있었다. 샐러드 코너에 있으면 소면도 샐러드지? 한 움큼 집어 담았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코알라는 첫 접시부터 고기를 가득 담아왔다.
"야, 그래도 되는 거야?" "언니, 뷔페에 법칙이 어딨어!"
2차전, 이번에는 앞서는 코알라를 엄호하며 따라갔다. 코알라가 스시 코너에서 초밥을 담길래 따라 담았다. 사실 나는 날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왠지 초밥을 먹는 게 멋있어 보일 것 같고 비싼 음식으로 뽕을 뽑아야 할 것 같았다. 먹어보니 생각보다 맛있어서 담아 온 초밥을 전부 먹었다.
"언니, 초밥 싫어하지 않아?" "야, 왠지 여기서 먹으니 맛있다!"
3차전, 더는 눈치 보지 않기로 했다. 돌격 앞으로! 들어올 때부터 먹고 싶었던 각종 육류와 튀김류를 가득 담았다. 이미 탄수화물 두 접시를 먹어놓은 상태라 벌써 배부른 느낌이 들었지만, 탄산음료로 눌러 가며 신나게 먹었다. 맛집이 아니라고 누가 그랬나! 입 속에서 팡팡 터지는 다채로운 향과 맛, 혀가 녹을 만큼 맛있었다.
"어머 언니, 진짜 맛있게 먹는다. 그건 어디에 있었어?" "저어기! 너도 먹어봐!"
4차전, 확인 사살의 시간이다. 먼저 접시에서 먹었던 음식 중에 맛있었던 것들만 욕심껏 더 담아왔다. 추가로 뷔페에서 먹으면 손해라던 떡볶이, 만두, 김밥, 피자 등도 차마 포기할 수 없어 담았다. 전문점에서 따로따로 파는 것보다 맛있진 않았지만 한꺼번에 먹으니 기분이 좋았다. 손해든 말든 내가 좋으니 됐다! 전국을 제패한 기분!
"언니, 나 떡볶이 한 입만!" "지지배, 지가 담아 오지."
5차전, 이제는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었다. 너무 배가 불러서 위기감이 왔지만, 남은 디저트들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먹지 않으면 집에 가서도 내내 생각이 날 것 같았다. 손가락 마디만큼 잘게 잘라놓은 예쁜 케이크들과 쿠키, 요거트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그것을 보니, 방금까지 꼭 차 있던 배가 일시적으로 공간을 만들어냈다. 마지막까지 물러섬 없이 불태우리라.
"어어- 나 왠지 더 먹을 수 있을 거 같아!" "오케이, 우리 지지 말자."
"코알라야, 여기 오자고 해줘서 고마워. 정말 너무너무 맛있다."
장렬한 식사를 마치고 인사하는 내게, 코알라는 내가 너무 잘 먹어서 기쁘다고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그 뷔페는 내가 '막입'이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맛집이었다. '맛잘알' 코알라도 나와 똑같이 5접시를 해치운 것이 그 증거였다. 우리는 마지막 접시의 마지막 한 톨까지 싹싹 긁어먹고 일어났다.
카운터에서 결제를 마치고 식당 밖 라운지까지 걸어가는 데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때 매다 빵빵해진 배가 흔들리며 명치가 뭉근하게 답답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숨쉬기가 힘들었다.
비상사태! 응급조치가 필요하다, 메이데이 메이데이!
그때, 눈앞에 의자가 보였다. 코알라와 나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텔레파시가 통한 듯 동시에 나란히 의자에 앉았다.
"자, 잠깐만 앉았다 가자. 나, 나 지금 못 걸어."
"어, 언니. 나 숨쉬기가 힘들어. 뱃속에서 음식이 불어나나?"
"와, 이거. 여기 의자 없었으면 큰일 날뻔했다."
우리는 숨이 차서 제대로 웃을 수도 없어 바람 새는 소리로 웃었다. 웨이팅 대기용인 줄 알았던 의자의 진짜 용도를 알아버렸다. 우리같이 욕심을 주체 못 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과식한 사람들을 위한 의자였나보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한참 심호흡을 했다.
호기롭게 음식을 끝장낸다고 했지만, 진짜 끝장나 버린 건 우리였다. 애도 아니고, 이렇게 바보같이 과식하는 어른이 있나. 우리는 자꾸 웃음이 나 실실거리다가 '토할 것 같으니 웃기지 말라'며 서로를 떠밀었다. 그렇게 투닥거리다 십오 분이나 지나고서야 겨우 일어나 뒤뚱거리며 돌아갔다.
이야기의 끝이 '과욕, 과식은 금물'이어야 할 것 같지만, 나는 과식한 이 날의 기억이 너무 좋다. 사실 무엇을 먹었는지, 무슨 맛이었는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코알라와 나눴던 농담, 웃음, 표정들이 기억에 남았다. 우리는 그 이후 그 뷔페에 다시 가지는 않았지만, 종종 마트 가는 길에 그 의자를 가리키며 그때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서른 중반이 된 지금은 소화력이 떨어져 옛날만큼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는 신세다. '뽕'을 뽑을 수 없는 이제는 뷔페에 가기엔 돈이 너무 아까워졌다. 멍청한 과식도, 막무가내 식사도 할 수 있는 시기는 한정되어 있나 보다. 그렇다면, 그 역시 나름대로 귀하다고 생각한다. 행복하다면, 즐겁다면, 친구와 함께라면, 젊은 날 과식하는 날 하루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