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오얀 상아색과 사랑스러운 연분홍색이 반반 섞인 동그란 막대사탕. 포장을 벗겨내자마자 공기를 타고 흐르는 설탕 같기도 분유 같기도 한 단내, 그 안에 존재감을 잃지 않는 선명한 딸기향. 우유 특유의 부드러움과 딸기의 향긋한 달콤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츄파춥스 딸기&크림맛.
추적추적 비가 오던 어느 날 저녁 일곱 시, 연애 초반 아직 조심스럽고 설렜던 '가젤'과의 데이트에 나는 츄파춥스를 선물 받았다.
"오늘 길에 꽃을 사 오려고 했는데 늦어서 그런지 꽃집이 다 문을 닫았더라. 그래서 꽃 대신 사탕을 샀어."
앙증맞은 딸기와 흰색의 동그라미(아마도 '크림'을 형상화한 이미지)가 강강술래 하듯 옹기종기 모여 원을 그리는 그림의 분홍색 포장지. 그 안에 쌓인 작고 귀여운 츄파춥스. 편의점에서 단돈 300원이면 살 수 있는 흔한 막대 사탕이지만, 흔하디 흔한 그 사탕 하나가 어찌나 소중하고 예쁘게 보이던지. 나는 그 포장지까지 두고두고 가보로 보관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오후, 나는 츄파춥스의 포장지를 조심스레 벗겨내 사탕을 입에 물고 아주 천천히 오물거리며 먹기 시작했다. 사탕의 맛을 최대한 자세히 느끼기 위한 노력이었다. 가젤에게 사탕의 후기를 생생하게 전해주고 싶어서.
때마침 가젤에게 전화가 걸려 와 나는 반갑게 받으며 말했다.
"마침 자기가 준 사탕 먹고 있었어. 오랜만에 먹었더니 진짜 맛있다! 포장지 보관하려고 안 찢고 살살 벗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온 가젤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그걸, 먹었어?"
가젤은 '꽃 대신'으로 준 사탕을 어떻게 먹을 수 있냐고 했다. '꽃처럼' 그 상태 그대로 보관하라고 준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음식'을 주었으니 당연히 먹으라는 뜻으로 이해했다고 항변했다. 티격태격 몇 마디가 더 오간 다음, 가젤은 '여전히 이해는 안되지만 일단 알았다'고 대화를 일단락 지었다. 이후 우리는 다시 알콩달콩 모드로 돌아왔지만, 나는 왠지 계속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그렇게 탓하며 따져들 얘기였나?
'츄파춥스 사건'은 가젤과의 연애 전망을 미리 알 수 있는 '티저'였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 '먹는 나'를 못마땅해하는 가젤의 다양한 간섭과 타박 퍼레이드를 볼 수 있었다.
매일 저녁 무엇을 먹었는지 확인해서 내가 '다이어트 식단'이 아닌 '일반식'을 먹은 날이면 가젤은 한숨을 푹 쉬거나, '대체 다이어트는 언제 할 거냐'며 엄하게 나를 혼냈다. 내가 내 입으로 다이어트를 할 거라고 말한 적은 있었지만, 그에게 개인 트레이너처럼 관리를 부탁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만큼 나쁜 음식을 먹는 것도 아니며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었다.
나는 억울했다. 나 역시 가젤에게 불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젤은 마른 몸매를 가졌지만, 술을 입에 달고 살고 운동은 전혀 하지 않아 매일 잔병치레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매일 하는 앓는 소리가 지겨웠지만, 삶의 방식이나 건강 같은 개인적인 부분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 잔소리를 참고 있었다. 그런데 가젤은 내 사생활에 이렇게 가볍게 막 훈수를 둔다고?
결국 가젤과의 연애는 얼마 못 가 막을 내렸다. 서로에게 불만이 큰 사이였으니 당연한 결말이었는지 모른다. 다만 나를 재단하려던 그의 날카로운 말들에 베이고 할퀸 자존감이 너덜너덜해졌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츄파춥스가 싫어졌다.
싫은 츄파춥스를 달리 보게 된 건, 그것에 얽힌 또 다른 오랜 추억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매년 화이트데이면 정 많은 누군가가 돌리는 '우정 사탕'을 받게 된다. 이번 년도 우정 사탕도 역시 '딸기&크림'맛. 츄파춥스의 베스트셀러인지 매번 선물 받는 사탕은 전부 '딸기&크림' 맛이었다.
안녕? 또 보는구나, 강강술래 중인 딸기와 크림 녀석들아.
"츄파춥스에 다른 맛은 없어? 예전엔 새콤한 것도 있었던 거 같은데."
누군가의 말에,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맑은 주황색과 투명한 흰색이 반반 사선으로 섞인 다홍빛 사탕알. 입술로 막대를 물고, 사탕을 입안에서 좌우로 굴리면 '다가닥' 어금니에 닿는 단단하고 경쾌한 소리가 나던. '크림' 섞인 다른 사탕들보다 훨씬 딱딱해서 깨져나간 표면의 흠집이 꼭 혓바닥을 베던. 그럼에도 침이 잔뜩 고이는 시큼 달달한 맛이 입안을 싸악 씻어주는 후련함 때문에 자꾸만 먹게 되던, 츄파춥스 오렌지 맛!
중학시절부터 단짝으로 지내 온 '라쿤'과 나는 성격도, 외모도, 입맛도 어쩜 짜고 맞춘 것처럼 정반대였다. 츄파춥스를 골라도 라쿤은 향긋하고 부드러운 딸기&크림 맛을, 나는 새콤달콤한 오렌지맛을 골랐다.
나는 우유가 섞인 '크림'류 사탕을 먹고 나면 입이 텁텁하고 목이 말라져서 딸기&크림 맛을 싫어했고, 라쿤은 신맛이 너무 강해서 먹고 나면 입이 아린다며 오렌지 맛을 싫어했다. 그래도 서로가 맛있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서로의 사탕도 탐이 나곤 했다.
"네 꺼 맛있어 보인다?"
"엉, 네 꺼도. 맛있냐?"
"야, 바꿔먹어 볼래?"
사춘기의 한복판에 있던 라쿤과 나는 가끔 기행을 일삼곤 했다. 이를테면, 각자 빨아먹던 사탕을 바꿔 빨아먹는 비위생적인 짓을.
우리는 기행 그 자체보단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즐겼다. 사탕을 바꿔 입 안에 넣어보고, 별로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선 일부러 다른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자꾸 사탕을 바꿔먹었다.
"히익!!!"
그래, 아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이런 소리를 내며 기겁할지도 모른다. 우리를 지켜보던 무고한 학우들도 다들 저런 소리를 내질렀다. 더럽다고 욕을 하는 친구도 있었고, 경멸하는 표정으로 조용히 얼굴을 돌리는 친구도 있었다. 진지하게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묻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라쿤과 나는 친구들이 학을 뗄수록 더 신이 나서 사탕을 바꿔 먹었다.
'우리끼리는 전혀 더럽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낄낄거렸다. 유치하지만, '우리가 이 정도로 친하다'는 일종의 과시였던 모양이다.
라쿤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엄청난 중력의 행성 같은 사람이었다. 수학여행 마지막날 장기자랑에 자처해서, 또는 친구들에게 떠밀려서 세 번씩이나 무대에 오르는 학교의 연예인이었다. 그녀는 늘 주목의 대상이었고 스스로도 그 관심을 즐기는 성격이었다.
반면 나는 누구의 주목도 원하지 않는, 아니 오히려 주목을 받을까 봐 두려운, 투명인간이 꿈인 학생이었다. 누군가 선의로 말을 걸고 칭찬해 주어도 부끄럽고 부담스러워서, 차라리 없는 자리에서 해주길 바랄 정도로 사교성이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내가 먼저 뭔가 자랑하는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만 라쿤과 친하다고 과시하는 일만큼은 예외였다. 사탕을 바꿔먹는 등의 이상한 짓으로 필요이상의 주목을 받는데도 스스로가 이상할 정도로 태연한 기분이었다. 이런 '튀는 짓'은 내가 아닌 라쿤의 영역인데, 어쩌다 깨닫지도 못한 새 그녀의 영역으로 얼렁뚱땅 끌려들어 갔어도 그저 해맑게 즐거웠다.
이유는 글쎄, 내가 먹던 사탕도 아무렇지 않게 먹어주는 라쿤이 '완전한 내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라쿤과 함께하는 일은 전부 낯선 일이었지만, 모두 다 괜찮았다. 부끄럽고 민망하고 수치스러워도 다 괜찮았다.
그때 라쿤과 나눠먹은, 입 안에 남았던 사탕의 맛은 싫어하던 텁텁한 크림맛이었지만 꽤 맛있었던 것 같다.
먹을 것을 줘놓고, 왜 먹었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던 연인이 있었다. 그리고 입이 아려 싫어하는 맛이더라도, 내가 먹던 더러운 사탕이라도 맛있게 먹어주는 친구도 있었다.
분홍빛, 주황빛 탐스러운 사탕. 이 죄 없는 막대사탕들을 두고 무엇을 떠올리며 살지는 내가 선택할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