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시 Aug 21. 2024

주사 탐구, 우리 취하면 어떻게 될까?

<첫 술> 

 

 

깜빡깜빡, 불시에 켜진 등불처럼 번쩍 눈이 떠졌다. 메말라 쓰린 눈알에 눈물 칠하랴, 분주히 열고 닫히는 눈꺼풀에 시야가 점멸했다. 아직은 새벽녘이 분명한 푸르스름하게 어둑한 사위. 자다가 깨어났구나, 깨닫자마자 한 박자 늦게 불쾌한 감각들이 나를 덮쳤다. 바짝 말라 까슬한 입술과 입 안, 침대보다 깊숙이 낮은 곳에 가라앉은 뇌가 둥둥 울리는 듯 묵직한 두통, 목구멍에 차오르는 울렁울렁한 매슥거림.

나는 연기가 가득 찬 듯 매캐한 머릿속을 헤쳐 어제의 마지막 기억을 찾아냈다. 2차까지 가서 한 병 반쯤 더 마시고, 집에 걸어서 들어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띠 띠 띠 띡, 띠로링.’ 집 현관문을 여는 도어록 해제 소리까지 기억이 나고, 그 뒤로 완전한 암전. 아, 또 기억이 끊겼네.

 

주변을 더듬어 손에 걸리는 핸드폰을 집어 화면을 두드렸다. 쏟아지는, 눈을 때리는 폭력적인 빛. 눈살을 찌푸리고 최근 통화기록을 눌렀다.

 

[라쿤/ 오늘 오전 00시 19분. 발신 전화, 13분 27초]

 

와 씨, 또 저질렀네. 해 뜨면 라쿤에게 사과 문자라도 보내야겠다. 나는 후회로 신음하며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나의 ‘주사’는 필름이 끊기는 것이다. 술자리에선 멀쩡하다가도 집에 도착하는 순간, 싹둑 잘라낸 것처럼 기억이 뚝 끊긴다. 아마 집에 도착하면 긴장이 풀리면서 기억을 잃는 것 같다. 그대로 곱게 잠이나 들면 참 좋을 텐데, 문제는 그 늦은 시간에 자꾸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는 것이다. 가끔은 엄마나 친한 언니에게, 대개는 친구 라쿤에게.

 

[야 미안하다. 어제 전화했나 본데 너무 취해서 기억이 안 난다ㅠ 나 무슨 얘기 하디?]

[아ㅋㅋㅋㅋ 기억 안 나? 겁나 웃겨.]

 

제정신으로 돌아온 아침, 염치없이 보내는 메시지에도 라쿤은 너그럽게 웃어준다.

 



열여덟 살, 질풍노도의 시기. 나는 유흥이나 일탈에는 별로 연이 없는 학생이었지만, 알코올에 대한 궁금증 정도는 남들만큼 가지고 있었다. 술은 무슨 맛일까, 마시면 무슨 기분이 들까, 나와 내 친구들은 취하면 어떤 모습일까. 딱 2년만 더 기다리면 자연히 알 수 있을 일이었지만, 그때는 참 이상하게도 시간이 참을 수 없이 느리게 갔다.

그래서 나와 친구들은, 불건전한 의도 없이 그저 '탐구의 자세'로 시험의 기회를 만들었다. 마침 본가가 학교와 멀어서 자취하는 친구가 있었고, 우리는 그녀의 집에서 대망의 알코올파티를 벌이기로 했다.

 

때는 토요일 오후, 외박을 허락받지 못한 친구들도 있었기에 우리는 햇볕이 쨍쨍한 대낮부터 모였다. 각자 집에서 한두 병씩 훔쳐 온 술을 꺼내 모았다. 이후 집에 발각되었을 때의 후환은 각자 감당하기로 했다. 안주도 빼놓을 수 없지, 우리는 두근두근 상기된 얼굴로 우르르 편의점에 쳐들어갔다. 야, 다 쓸어 담아! 한참 분주한 손길이 오갔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계산대에 쌓인 것은 색색의 봉지 과자들뿐이었다. 술을 먹기 전에 밥을 든든히 먹어 빈속을 채우고, 국물 있는 안주와 함께 마셔야 천천히 취하고 속이 덜 아프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자, 건배!"

 

아무것도 몰라서 용감한 열여덟 살들은 호기롭게 음주를 시작했다. '시작은 맥주부터' 라며 맥주를 마시는 친구들도 있었고 '술은 소주지' 하고 대범하게 소주부터 마시는 애들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옛날부터 대범함 빼면 시체인 큰 인물이었다.

 

소주잔을 입술 밑에 대는 순간 확 풍기는 알코올향. 과학실험 시간 맡았던 알코올램프 냄새보다는 더 날카롭고, 매니큐어 지우는 아세톤보다는 더 묵직한 냄새. 온 힘을 다해 '나는 식용이 아니요'라고 주장하는 듯한 꺼림칙하고 강렬한 냄새.

이거 진짜 마셔도 괜찮나? 잠시 망설여졌지만, 양옆의 친구들이 호쾌하게 고개를 젖히는 모습이 곁눈으로 보였다. 나만 뺄 수 없지, 간다! 눈 질끈 감고 손목을 탁 털어 꿀떡 삼켰다.

찌르륵, 소화기를 지나는 액체의 궤적을 생생히 알리는 뜨거운 통증. 여기가 식도입니다, 여기는 위랍니다, 필요 이상으로 친절한 위치 알람 서비스였다. 아, 이거 뭔가 잘못된 거 같은데.

하지만 멈출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오늘은 취하기 위해 모인 것이고, 다들 오늘을 위한 나름의 리스크를 감당했는데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에게 지고 싶지 않은 호승심 또한 한몫했고. 무엇보다, 궁금했다. 우리의 주사가!

 

"멈추기 없어! 마셔! 건배!“

 

 

결과는 당연히, 어이가 없을 정도로 금방 취했다. 그리고 나의 고유 주사가 그날 처음으로 나타났다.

 

'블랙아웃'

그것은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눈을 감고 뜰 때마다 나의 자세나 위치가 조금씩 변해있었다. 비디오 플레이어에서 구간 점프를 눌러 중간중간 시간을 빨리 감아 버린 것 같았다. 분명 상 앞에 앉아 과자를 집어 먹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장롱에 기대어 눕듯이 앉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다음 순간엔 왜인지 이불에 누워있었고, 다음엔 갑자기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고, 그리고 다시 이불에 누워 눈을 떴다.

옆에는 소주파 친구들이 누워 뭐라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고 있었다. 맥주파 친구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소주파 친구들에게 제발 이것 좀 마시라고 숙취해소제를 주며 애걸했다. 누군가 내 손에도 숙취해소제를 쥐여줬다.

 

"라..쿤? 야, 라쿤은 어딨어? 라쿤! 라쿤!“

"알시 깼어? 야 네가 라쿤 좀 달래 봐, 라쿤 자꾸 울어."

 

나는 문득 내 단짝 라쿤이 보이지 않아 불안해져 그녀를 다급히 찾았다. 라쿤은 방 한쪽에 앉아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맥주파 한 명이 옆에서 그녀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아니, 라쿤 무슨 일이야? 달래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라쿤, 울지 마.. 울지 마! 크억, 쿨럭! 쿨럭쿨럭!"

 

숙취해소제를 마셔야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음료를 그대로 입에 부어버렸다. 중력을 이길 수 없는 액체는 어설픈 조준 탓에 입에 조금, 코에 왕창, 그리고 내가 누워있는 요 위로 후두둑 흘렀다. 나는 입에 부은 액체가 대체 왜 입안에 들어오지 않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살기 위해 켈록켈록 기침했다. 그리고 암전.

 

눈을 뜨자, 누군가 또 내 손에 숙취해소제를 쥐여줬다.

 

"라쿤, 고마워."

"나 악어야. 빨리 마셔, 이거나."

 

힐끗 본 저 멀리엔 라쿤이 여전히 울고 있고, 나는 여전히 음료를 붓고, 입보다는 코로 더 마시고, 켈록켈록, 암전.

 

눈을 뜨면,

 

"좀 낫냐? 괜찮아?"

"응, 라쿤 고마워."

"나 하마야, 정신 차려."

 

친구가 물을 건네고, 다시 누워서 마시려다 친구가 말리고, 겨우 상체만 일으켜서 두 모금 마시고, 일어나니 보이는 라쿤은 이제 아예 대성통곡을 하고 있는데, 어서 달래줘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천장이 보이고, 암전.

 

또다시 겨우 눈을 뜨면,

 

"알시야, 이제 일어나야 해. 집 갈 시간이야."

"어...엉, 나 깼어! 가자 라쿤아."

"나 앵무야. 넌 취하면 다 라쿤으로 보이냐? 뭔 죄다 라쿤이래."

"내가.. 그랬어?"

 

그래서 라쿤은? 휘휘 둘러보니 우느라 지친 라쿤은 옆에서 쿨쿨 잘만 자고 있었다.

그렇게 궁금했던 각자의 주사는 단 한 번의 음주로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라쿤의 술버릇은 울기. 내 술버릇은 필름 끊김, 그리고 끊임없이 ‘라쿤’ 부르기.

 

나는 그날 이후로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았다. 대신 대학시절엔 술독에 거의 빠져 살았고, 덕분에 삼십 대 중반이 된 요즘은 적당히 취기를 조절하며 마실 줄 알게 되었다. 다만 가끔 방심하고 실수하는 때도 있어서, 더 많이 더 급하게 마신 날에는 으레 '그 주사'들이 튀어나와 버린다. 지겨운 '블랙아웃'과 어김없는 '라쿤 부르기'. 

심지어 이제는, 핸드폰이라는 너무 편리한 기계 때문에 오밤중에도 마구 전화를 걸어 라쿤을 불러대고 만다.

 


 

[라쿤아, 너 술 처음 먹고 꽐라 되어서 울었던 거 나 글로 써도 되냐?]

[엉. 써ㅋㅋㅋㅋㅋ 재밌겠다. 야 나 요즘도 술 먹고 울어]

[뭐? 왜? 야ㅋㅋㅋㅋ 진상 고쳐]

[몰라 잘 안 고쳐진다. 막 서럽나 봐 모든 게ㅋㅋㅋㅋ]

 

그렇게 술이 마셔보고 싶었던 청소년들은 어느새 지방간을 걱정하며 술자리를 피할 궁리만 하는 어른이 되었다.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 깨닫지도 못한 새에 많이 변해버린 우리가 날마다 생경하다. 아침 9시 등교 시간부터 밤 10시 야간자율학습 시간까지, 부모님보다 더 오랜 시간 함께 생활했던 라쿤과 이제는 1년에 두 번쯤 겨우 만날 수 있게 되었고, 마음속 숨겨둔 비밀 이야기들을 나누며 나는 네가, 너는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한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안부 연락 속에 언급되는 서로의 낯선 일상들을 들어도, 들어도 기억하기가 영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바뀌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우리의 술버릇. 거의 사고에 가깝다고 할 만큼 엉망진창이었던 첫 술자리에서 확인한 ‘민폐’ 술버릇이, 왠지 이것만큼은 전혀 없어지지 않았다. 라쿤도 여전히 술만 마시면 운다는 얘기를 들으며 솔직히, 왜 이렇게 반갑던지. 너도 여전하네, 나도 여전하다 하고 깔깔 웃으며 옛날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기뻤다.

술만 마시면 우는 라쿤도 오밤중에 전화 거는 나도 최악의 술버릇이지만, 한동안은 즐겁게 느껴질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