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인생에 큰 결심을 해야 할 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보통은 흘러가는 대로 살아간다.
응당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방식을 의심 없이 그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모두가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나는 그랬다.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응당 마땅한 방식"은 바로 "쉼 없이 달려가는 것"이었다.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최대한 덜 쉬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버틸 수 있을 때까지만, 그러니까 한계까지 몸과 마음을 밀어붙여 노력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답이 아니라는 걸 25살이 저물어가는 이 시점에서야 아프게 깨달았다.
내 블로그를 쭉 정독하면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는 내용의 글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글을 쓸 당시에는 몰랐는데, 제3자의 입장에서 내 글을 다시 보니 좀 답답하게 느껴진다.
힘들면 쉬어. 할 일이 많으면 줄여. 왜 못 줄여. 결국 너 선택이잖아. 라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쉬기 두렵고, 할 일을 줄이기 두렵고, 내가 맡은 책임을 내려놓기 두렵고, 안정감의 기반을 최대한 빠르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쉬지 못했다. 왜? 내가 나 자신더러 쉬지 말라 했거든.
아무도 쉬지 말라고 한 적 없는데 내가 내 감옥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들어가앉아 있었던 거지.
물론, 지금까지 여러가지를 동시에 하며 마냥 힘들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열심히 사는 삶은 그 자체로 가치있다.
단기간 동안 많은 경험을 했고 자연히 많은 것을 배웠다.
올해 살인적으로 바빴지만 그럼에도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보람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의 애씀에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조금 단호하게 정지 버튼을 누르려고 한다.
장황한 서두 끝에 하고 싶은 말은 - 당분간 취준을 쉬겠다는 것.
오늘까지 지원하려고 준비 중이었던 기업이 무려 4군데였다.
전부 포기했다.
적어도 학기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새로운 공고는 쳐다도 보지 않을 것이다.
이 결정을 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혼자서도 긴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내년 경기는 더 침체된다는데. 문과 티오는 갈수록 줄어드는데. 상반기는 덜 뽑는다는데. 이래도 되는 걸까?
그러나 지치고 혼란스러운 나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경기니 티오니 하는 이야기들은 그저 무색해져 버렸다.
솔직히 지금 메인으로 타겟팅하고 있는 직무에 대해 애정이 크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커리어를 어떻게 쌓아나가고 싶은지, 궁극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 나만의 답이 명확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나의 답이라고 스스로 세뇌시켰던 것인지도 모른다.
외교관 시험을 준비할 때 나는 외교관 아니면 안된다고 스스로 세뇌시켰던 것처럼.
난 정말 어떤 일을 하고 싶은 걸까. 그걸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이런 기초적인 질문에 대한 답도 스스로 못 내리고 있는 상황인데 무슨 취준을 하겠다는 걸까.
고시를 포기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것은 "새로운 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명확한 꿈이 있어야만 취준을 할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닐 것이다.
막연한 방향성만 가지고도 충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어찌 됐건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을 할 여유 정도는 가졌어야 했다.
나는 그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인턴, 학회, 근로, 전공수업, 자격증 공부 ... 여러 일을 한꺼번에 벌여놓고, 이걸 바쁘게 하다 보면 답이 찾아지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분주함은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빼앗아갔다.
분주함이 답이라고 생각했는데, 분주함은 "오답"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답은 명확해졌다.
지친 나 자신을 돌보면서 내 꿈을 구체화하는 것. 이것이 당분간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취준을 잠시 내려놓는 것의 또다른 장점은 지금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소중한 가치를 지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막학기 대학생인 나에게는 학교수업을 잘 듣고 많은 것을 배워가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12월까지도 취준에 매달린다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학기에 내가 정성스럽게 선택한 다섯 과목을 끝까지 잘 마무리하고 싶다.
학회에서는 현재 우리 학회의 클라이막스급인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또한 최대한 잘해내고 싶다.
고시반 일도 그렇다. 실장일을 언제까지 할지 계속 고민 중인데, 아마 곧 다음 실장에게 인수인계를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까지 기획한 것들을 잘 끝내고 싶다.
학교수업, 학회, 고시반 - 딱 지금 나에게 주어진 과업들. 지금 아니면 못 지키는 것들.
그러니 나는 이것들을 선택했다.
이 선택이야말로 올바르다고 믿는다. 나라는 사람에게 가장 잘 부합하는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올해가 한 달 가량 남았다.
12월은 숨을 좀 쉬고, 많이 생각하고, 최대한 놀고 싶다.
내년 상반기에 정말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하는 시간으로 삼고 싶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