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ontrolfind Apr 02. 2023

003# 일단 해보자, 그게 무엇이든

바이러스 따위가 날 막을 순 없지

[지난 에피소드]

001#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002#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사니? 




‘휴학생’ 이라는 타이틀만큼 좋은 건 없는 것 같다. 학생이라는 바운더리 안에 있으면서도 자유도는 훨씬 높으니 말이다. 세상에 내던져지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로이 실천해볼 수 있는 시간이랄까. 4학년 1학기를 마친 시점, 당찬 포부를 가지고 휴학 신청을 했었다. 취업 준비도 해두고, 유럽 여행도 가고, 사회 경험도 많이 쌓으며 알찬 ‘합법적 백수 기간’을 보내야지! 처음으로 짜여진 시간표에 따라 생활하는 게 아닌 내가 만들어가는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에 잔뜩 들뜬 마음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의 휴학 생활은 지독한 바이러스와 함께하게 됐다. 대구에서 31번 확진자가 나온 날, 나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늘 붐비던 가게에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거리엔 조용하고 싸늘한 기운이 가득해 지구 종말 직전인가 싶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날부로 사장님은 잠정적 영업 중단을 선언하셨고, 나도 칩거생활을 시작했다. 한 달 내내 집 밖을 나서지 못하니 햇살의 촉감과 공기의 냄새가 가물가물했다. 인터넷에선 대구를 봉쇄하자는 이야기도 터져나왔다. 모두가 무기력함에 사로잡히는 게 당연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자격증 시험은 줄줄이 취소되었고, 유럽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끔찍하게도 할 일이 없었다. 드라마 정주행도 다 하고, 처음 시작한 게임에서 최고 랭크도 달았다. 집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는데 이젠 도대체 무얼 해야 할까? 아무 것도 안하는 게 꿈일 때도 있었는데 그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이야. 정신이 썩어들어가는 것 같아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던 참에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알바비를 모아 호기롭게 구매한 아이패드였다.


궁극의 심심함은 궁극의 창의성으로 발현이 되었다. 할 일이 없으니 생각할 여유 또한 너무나도 넘쳤다. 재미삼아 슥슥 그린 캐릭터가 맘에 들어 그 아이에게 성격을 부여하고, 친구도 만들고, 인스타그램 계정도 운영했다. 이걸로도 모자라 매달 이들이 등장하는 달력 배경화면을 만들어 공유하고 스터디플래너와 다이어리 양식도 제작해 블로그에서 배포하기 시작했다. (이 시절 지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작가님’이었다.) 금전적인 대가가 없어도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니! 내가 몰입할 수 있는 일은 창조이고, 그 원동력은 사람들의 반응과 인정임을 여실히 깨달았다. 당시 물 들어올 때 노를 더 저었더라면 내 인생의 방향은 지금과 크게 달라졌을 것 같은데… 계속 직진하지 않고 방향을 틀게 된 건 우연히 받은 문자 한 통 때문이었다.


헤드헌팅 회사로부터 날아온, 모 기업의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채용중이라는 소식은 지루함이 극에 달했던 나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이름을 대면 알 만한 꽤나 큰 회사였는데, 이 문자가 왜 쥐뿔도 없는 나한테 왔는지에 대해 잠깐 경계심도 들었지만 검색 몇 번으로 의심을 가뿐히 잠재울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바로 컴퓨터를 켜 자소서를 적기 시작했다. 회사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들을 다 끌어와 나열해둔 뒤 글자수를 꽉꽉 채워 냈다. 사실 별 기대는 안 했다. 지원해보는 자체가 경험이다 생각하며 제출 후 잊고 지냈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본 지원자는 나 포함 세명. 기다리며 나머지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감이 팍 왔다. 이건 안 되는 게임이구나! 에라, 그냥 즐기기로 했다. 면접 내내 긴장도 안 했다. 묻는 말에 대답 열심히 하고, 그저 방긋방긋 웃고, 심지어 "제 자소서 제대로 읽어보신 거 맞아요? 얼마나 열심히 썼는데!" 라며 면접관 두 분께 농까지 던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미친 용감했던 것 같다.) 


... 세상에는 초심자의 행운이란 게 존재함이 틀림없다. 며칠 뒤 합격 문자를 받았고, 나의 첫 번째 회사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004# 일복도 관상에 티가 나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