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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Dec 28. 2023

소유와 망각

팀원분들과 연말 회식을 하다가 학창 시절 공부 이야기가 나왔다. 영어 학원에서 강의도 해보신 분이 영어는 결국 지문을 전부 외우는 걸 기본으로 깔아야 한다는 얘기를 하셨고 나는 "그래서 중학교 때 제 영어 등수가 4~500등이었군요"라며 웃었다. 실제로 학창 시절 때 수학, 과학으로 벌어둔 등수를 영어, 사회에서 모두 까먹는 학생이었다. 암기력이 정말 안 좋았다. 근의 공식도 잘 안 외워져서 빠른 계산력을 믿고 그때그때 완전제곱식 형태로 만들어 풀곤 했다. 과학 중에서도 수학과 비슷한 물리는 좋아했지만, 외울 게 많은 화학이나 생물은 안 좋아했다. 어른이 되었다고 암기력이 나아지진 않았다. 오히려 건망증도 추가되면서 더 심해졌다. 내가 쓴 글도 대충 주제는 기억나지만 어떤 내용을 쓰고 결론이 뭐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날 정도가 됐다.


글로 정리해서 기록해둘 정도로 내 생각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쓰고 나면 까먹는 모습을 보며 창작물들에 대한 애정이 너무 없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 얼마 전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이라는 책으로 독서모임을 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마음을 치유하는 방법에 대해 나누다가 글쓰기도 하나의 해법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왔다. 내 감정을 있는 날 것 그대로 써내리고 나면,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이 모두 글 안으로 씻겨내려가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김영하 작가님께서 회사에서 강의하신 적이 있었는데, 이때도 비슷한 방법을 추천해 주셨다. 작가님께서는 이면지에 지금의 감정을 그대로 써내린 다음, 북북 찢어버리라고 하셨다. 이러한 기록은 저장이나 기억하고는 정반대의 목적을 지닌다. 떨쳐내고 잊기 위함의 기록이다. 기록은 꼭 기억의 목적만 지닌 게 아니었다.


책을 많이 읽다 보니 종종 주변에서 좋은 책을 추천해달라는 얘기를 듣는다. 스스로 올해의 책 같은 걸 선정해 보기도 한다. 어떤 책들이 좋았는지는 쉽게 떠오른다. 근데 그 이유나 내용이 생각 안 날 때가 많다. 분명 좋은 책이었다는 건 기억하는데, 어떤 부분 때문에 좋았고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다시 펼쳐 읽어보면 아 그래 역시 이래서 좋은 책이었지 하게 되지만 몇 달이 지나면 또 까먹곤 한다. 이를 고치기 위해 독서기록 같은 걸 해야 하나 하는 생각하고 시도도 했지만 결국 귀찮음에 흐지부지됐다. 마음에 부채처럼만 남아있다가 <소유냐 존재냐>를 읽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학습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소유적 실존양식에 길든 학생들은 강의를 들을 때, 놓치지 않고 어휘들을 경청한 뒤 그 논리적 연관과 의미를 파악하여 가능한 한 모조리 노트에 기록한다. 그래서 필기한 것을 나중에 암기하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들 고유의 사고체계를 풍요롭고 폭넓게 하는 구성요소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들은 강의내용을 경직된 사고의 집합체, 또는 그들이 저장해놓은 온갖 이론들 속에 억지로 밀어넣는다. 학생들 각자가 남이 확인해놓은 주장들을 소유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강의 내용과 학생들은 여전히 생소한 관계에 있다.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나는 어려서부터 필기를 거의 안 하는 학생이었다. 손으로 글씨 쓰는 것을 안 좋아하기도 했지만, 받아쓰기를 할 시간에 말씀하시는 내용의 이해에 더 신경을 쏟고 싶었다. 최대한 수업 때 들으면서 이해하는 것에 집중했고, 이때 이해하지 못한다면 내 수준이 그 정도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넘겼다. 프롬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기록이나 기억의 소유에 집착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만족하는 학습법이었다. 단순히 글자를 넘어서 그 당시의 교수님의 분위기나 말투에서 비롯되는 이해도 많았고, 들으면서 바로 스스로와 문답하며 만든 이해도 있었는데 필기와 병행했다면 이 모든 것을 해내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내용이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책을 읽기 전후의 나는 달라졌다. 책의 내용을 기억으로써 소유하진 않는다.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철학과 가치관 안에 녹아들었을 뿐이다. 이거면 된 게 아닐까. 오히려 기억으로, 기록으로 남기려다 왜곡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예전부터 언어의 해상도는 너무 낮다고 생각했다. 내 어휘력의 부족일 수도 있지만, 머릿속의 생각을 나타낼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해 뭔가뭔가 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한다. <페터 비에리의 교양수업>에서 소설을 쓰는 이유가 이것이라고 했다. 한 단어로, 한 문장으로, 한 문단으로, 한 칼럼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어 소설이라는 긴 이야기로써 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생각이 들 때마다 소설을 하나씩 쓸 수는 없다. 어떻게든 소유하기 위해 억지로 downscaling을 하다 보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추상적인 형태 그대로 내 안에 두려 한다.


인공지능 혁명에도 비슷한 면이 있다. 딥러닝 이전의 룰 베이스 알고리즘은 모든 정보를 소유했다. 명확한 데이터로 분기점을 조정하고 흐름의 설명과 검증이 가능했다. 인공지능은 달랐다. 흔히 뉴런이라 부르는 파라미터에 추상적인 수치들을 학습으로 조정하고 그 연결만으로 결과를 도출한다. 이 수치들 자체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어떤 정보와 어떤 과정으로 답을 도출했는지 알기 어렵다. 때문에 머신러닝 초기에는 일단 실행하고 기도하면 답이 나온다는 의미로 미신러닝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XAI(eXplainable AI)라는 인공지능의 결과 도출 과정을 설명하려는 연구 분야가 생겼지만, 이 또한 문제와 답이 주어졌을 때 그 과정을 설명하려는 것이지 모델 자체를 분석해서 설명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학습 데이터들이 산산이 분해되고 해석할 수 없는 파라미터로 녹아들어 모델로 존재만 하게 되었기에 더 고차원적이고 일반적인 문제도 해결이 가능해진 걸 수도 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인공지능을 학습시킬 때 의도적으로 망각시키는 작용을 넣는다. dropout이라는 기법으로 뉴런들의 연결을 확률적으로 끊는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확률 값은 20%~50%로 절대로 작은 수치도 아니다. 다들 더 많은 데이터를 원하면서도 굳이 데이터를 버리는 droupout 기법을 사용하는 이유는 과적합(overfitting), 즉 학습 데이터에만 너무 최적화되어 일반적인 문제를 잘 풀지 못하는 현상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dropout 기법이 필요할 수도 있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우리는 세상의 일부만 보고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소유하려 한다면 작은 세상에 갇혀 확장된 사유와 탐구를 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잊혀진 것은 잊혀진대로, 추상적인 것은 추상적인 대로, 변화한 내 존재 자체만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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