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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Jan 03. 2024

2023 연말 회고록

짤막한 감상으로 시작해 보자면, 올해는 유난히 꽉 찼던 한 해였다. 연초부터 열정적인 목표나 계획은 없었다. 그저 그때그때 흐르는 대로, 바라는 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지냈다. 하나하나 보면 그렇게 빡빡하게 하진 않았다. 많아야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인 일들인데 그 종류가 많아지다 보니 꽉꽉 들어차게 되었다.


하나하나 정리하며 회고를 해보려 하는데, 글을 쓰다 보면 순서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유리수의 개수에 대해 배울 때 가부번(可附番, 번호를 부여할 수 있음)이라는 성질을 다뤘다. 글은 완전히 가부번적인 형상이다. 문단, 문장, 글자까지 1번 2번 번호를 매길 수 있으니. 읽는 사람의 시간은 항상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니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가끔은 순서를 부여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어느 하나에게도 우열을 주고 싶지 않을 때, 그래프 같은 모양의 글을 써보고 싶다. 아무튼, 아래 나열한 올해 일들의 순서에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에 대해 조금 장황하게 써봤다.


이전부터 정기적으로 했던 것들부터 먼저 써보자면, 우선은 보드게임. 나는 보드게임 유저를 크게 둘로 나눈다. 가볍게 즐기는 사람과 보드게임에 진심인 사람. 룰 설명에 한 시간 정도 걸리고 플레이는 서너 시간 정도 걸리는 보드게임도 충분히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보드게임에 진심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나도 그런 사람이다. 운 좋게도 내 주변에 진심인 사람들이 있었다. 아닌가, 내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간 건가? 혹은 그런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뭉치게 된 걸까? 아무튼. 군대 때부터 보드게임을 위해 휴가까지 맞춰서 나올 정도로 진심인 친구들과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최근에는 멤버 한 명이 더 추가되어 한 달에 한 번쯤 만나는데, 만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드게임을 하곤 한다. 회사에 보드게임 동아리가 대여섯 개 정도 있는데, 그 중 지금 속한 동아리에 들어간 이유도 모집 글에서 보드게임에 대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번 여름에 동아리에서 MT를 갔는데, [집합-점심-보드게임-저녁-보드게임-수면-보드게임-점심-해산] 이라는 진심이 느껴지는 일정이어서 정말 마음에 쏙 드는 MT였다. 진심을 담는 취미가 있다는 것, 그리고 주변에 그 진심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소소하면서도 큰 행운이자 행복이지 않을까.


다음은 독서와 글쓰기. 먼저 수치적으로 가볍게 정산해 보자면, 36권의 책을 읽고 59편의 글을 썼다. 이렇게 숫자로만 보니 뭔가 쓴 것에 비해 읽은 게 부족해 보이지만 브런치/블로그의 글이나 장르소설까지 포함하면 읽은 게 훨씬 많긴 할 것이다. 독서모임도 28번으로 생각보다 많이 했다. 독서모임 때마다 책을 하나씩은 읽게 되는데 그렇게 보니 독서 모임 책이 아닌 책은 많이 안 읽은 것 같다. 독서모임장도 해봤다. 확실히 그냥 책을 읽고 끝나는 것에 비해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차원이 다른 깊이의 경험을 할 수 있다. 작년엔 까먹고 못 했는데, 올해의 책도 5권 뽑아봤다. 순서는 추천순이 아니라 내가 읽었던 순.


<세상의 잡담에 적당히 참여하는 방법>: 내향인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주는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삶의 철학과 가치관에 많은 영감을 준 책

<가재가 노래하는 곳>: 아름다운 묘사와 가슴에 저며드는 감성이 담긴 소설

<어떤 양형 이유>: 평소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준 책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에세이는 그 뒤의 사람이 느껴진다는 걸 가장 잘 보여주는 에세이


읽기에서 쓰기로 넘어오면, 이렇게 올리는 에세이에 대한 기조는 이전과 계속 동일하게 할 것 같다. 살면서 떠오른 생각 조각들이 잘 뭉쳐지면 정리해 써내리는 것. 이와 별개로 출판을 목적으로 구상 중인 소설도 좀 더 구체화했다. 처음 소설을 쓰려 할 땐 그냥 소설이라는 분야도 도전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는데, 올해에는 이 소설에 담고 싶은 주제가 생겼다. 그러다 보니 로맨스 스릴러라는 장르와 두 주인공의 성격, 죽음에 대한 사유라는 큰 뼈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건과 전개를 뒤엎었다. 많은 부분을 덜어내고 재구성 하게 됐지만 방향이 잡히니 구상에 더 힘이 붙는 게 느껴졌다. 계속 구상만 하는 것 같아서 일단 쓰고 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 코딩할 때도 뇌 빼고 코드 쓰기만 하면 되는 단계까지 설계한 다음 타자 치기 시작하는 편이라, 일단은 내 성향대로 진행해 보려 한다.


다음은 뜨개질. 매년 한 개씩 밖에 안 하지만 그래도 주기적으로 하긴 하는 활동이니. 올해도 어김없이 나만의 도안을 설계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작년에는 색에 중점을 두고, 대부분 하지 않는 세로 배색을 했었다. 그리고 왜 대부분 하지 않는지 깨달았다. 올해는 단색으로 하되 무늬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대바늘 뜨기에서 기초이면서도 무궁무진한 무늬를 만들 수 있는 게 교차 뜨기라 생각한다. 어떤 크기로, 어떤 위치와 순서로 넣는지에 따라 사선 무늬도, 마름모 도형도, 꽈배기 무늬도 넣을 수 있다. 이 교차 뜨기를 사용해 어떤 무늬를 만들어볼까 생각하다가 꽈배기의 꽈배기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큰 꽈배기 무늬에서 각 줄기도 꽈배기 무늬인 것. 재밌는 설계긴 하지만 예쁜 무늬가 나올까 걱정하기는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색이 파란색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특정한 흐름을 가지면서도 복잡한 불규칙함이 섞인 게 마치 물결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작년에는 이맘때쯤 완성했는데 올해는 작년보다 늦게 시작해서 아마 1월이 다 되어서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번 목도리 (좌), 이번 목도리 (우)


이제는 올해에 새로 시작한 것 혹은 정말 오랜만에 한 것들에 대해 정리해 보자. 먼저 스키장. 군대니 코로나니 하면서 한동안 스키장에 못 갔다가 오랜만에 드디어 스키장에 갔다. 이제부터는 주기적으로 가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스키복도 샀다. 스키장에 가면 보드를 타는 편이다. 어릴 때 스키를 타보고 생각보다 쉬워서 그 이후로는 보드를 타기 시작했다. 설계를 하거나 계획을 짤 땐 보수적으로 안정적으로 하는 편이면서도, 놀이 기구를 좋아하거나 이런 활동에서는 익스트림한 속도와 위험을 오히려 즐기는 걸 보면 역시 사람에게는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정말 오랜만에 타는 것임에도 한두 번 왕복해 보니 몸이 기억하는 게 신기했다. 다만 그동안 따로 배운 적 없이 독학으로 몸으로 체득하면서 보드를 탔는데, 상급자 코스로 가니 점점 그 한계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강습을 들어야 하나 싶으면서도 1년에 한두 번 가는 것에 친구들과 같이 타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수업을 듣기엔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어서 고민이다.


다음은 봉사. 올해는 꽤나 여유 있는 한 해였다. 잘 취업한 덕분에 넘치도록 풍족하진 않아도 생활이 안정될 정도는 되었고, 심적인 면에서도 가장 자존감도 높고 풍요로웠던 것 같다. 그래서 봉사활동을 해보기로 했다. 나는 정말로 선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잘 알아서, 콩 한쪽도 나눠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언제 다시 삶의 역경이 올 지 모르니, 다른 사람들에게 여유를 나눈다면 지금이 타이밍이라는 생각을 했다. 선한 일이라 하면 기부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돈으로는 내가 하고 싶은 다른 게 너무 많았다. 대신 시간을 쓰자고 생각해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마침 회사에 봉사 동아리가 있어서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청소년 쉼터에서 아이들 점심 차려주는 봉사를 하고 있는데, 사실 이 활동도 순수한 봉사의 목적만 있다기보단 요리와 운전 연습 등 부수적인 의도도 섞여있다.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다.


다음은 이사. 근무지가 바뀌면서 적당히 출퇴근 하는 것과 다양한 활동을 하기 좋은 곳에 대해 고민하다가 강남 쪽으로 이사를 했다. 위치는 정말 마음에 들지만 지역이 지역이니만큼 집값이 비싸서 방 크기가 거의 2/3으로 줄었다. 덕문에 원래 가지고 있던 가구들을 낑겨 넣느라 열심히 테트리스를 했다. 새로운 공간이 생긴다는 건 새로운 도화지가 생겼다는 것이다. 여러 곳에 의미를 담는 것을 좋아하는 내겐 이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 이사하면서 짐 나르는 건 정말 힘들었지만, 이후에 큰 가구부터 작은 소품까지 하나하나 고르고 만들고 배치하는 과정은 너무 즐거웠다. 집을 고를 때 내부 모습보다는 교통과 인프라를 중점으로 봤는데, 내부는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달성했다. 어느 정도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그래도 크기는 어쩔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식기세척기와 건조기를 정말 넣고 싶어졌는데, 어떻게 해도 공간이 나오질 않아서 더 큰 집으로 이사하고 싶은 욕구가 들기 시작했다. 처음 이 집에 이사하고 꾸민지 얼마 안 됐을 땐 아파트 청약에 될 때까지 여기에 살아야지 했었는데 벌써 마음이 바뀐 걸 보면 역시 인간의 욕심에는 끝이 없는 것 같다.


다음은 해외여행인데 <6년 만의 해외, 일본 여행 주저리>에서 썼으니 패스. 올해는 처음으로 혼자 여행도 다녀봤는데 이에 대한 글도 <자연이 자연스러운 곳>에 썼으니 패스. 돌이켜보면 안 좋은 여행 기억은 없던 것 같다. 안 좋은 기억은 잘 까먹는 편이긴 하지만, 아무튼 기억이 나는 여행은 다 좋았다. 새로운 장소와 다양한 경험은 언제나 즐겁다. 이번에 회사에서 리프레시 휴가 15일이 나왔는데 그동안 계획만 세웠던 유럽을 드디어 가볼까 생각 중이다. 미국도 예전에 프로그램 들으러만 잠깐 가봤는데, 제대로 한번 가보고 싶다. 가고 싶은 곳은 많고 시간과 돈은 부족하고... 빨리 황금 백수가 되고 싶다.


다음은 드럼과 합주. 언젠가 밴드 악기를 배워보겠다는 막연한 다짐은 있었다. 저음부를 좋아해서 한다면 베이스나 드럼을 하려고 했다. 멋 자체만으로 생각해 보자면 베이스가 더 끌리기도 했지만 경험과 도전의 차원에서 생각을 해봤다. 예전에 기타를 잠깐 해본 적 있어서, 기타와 베이스는 많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비슷한 걸 해봤다는 생각을 했다. 이에 비하면 드럼은 비슷하게도 해본 게 없는 완전한 새로운 차원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만약 새로 악기를 배운다면 드럼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다짐만 하고 실천은 후순위로 미뤄뒀다. 그러다 김소민님의 글 <불가능은 없다>를 읽었다. 너무 부끄러웠다. 무엇이 부족하고 두렵다고 이런 것 하나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가. 그 길로 바로 드럼 학원에 등록했다. 원래 밴드 동아리를 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마침 드럼과 베이스 자리가 비어있었다. 다른 친구 한 명을 베이스로 영입해서 합주 팀을 이뤘다. 보컬과 기타 친구들은 원래 베테랑들이고 베이스도 예전에 친 적 있던 친구인데 나만 완전 생초보라, 친구들은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왠지 부담이 된다. 어찌어찌 내게 잘 맞춰주는 것에 고마워하며 열심히 해보고 있다.


다음은 연극/뮤지컬/전시. 아무튼 다양한 문화관람. 이런 문화관람은 예전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막상 해보려 하면 막막했던 분야였다. 오히려 선택지가 많아서 너무 많아서 좋은 작품은 어떤 기준으로 고르고 초보자는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좋은지 알기 어려웠다. 연극과 뮤지컬은 이런 것들을 많이 보는 사촌 동생의 가이드로 시작할 수 있었다. 좋은 작품도 추천해 주고, 처음엔 같이 가주면서 이런저런 관람 예절이나 재미 포인트(여기가 원래 대본은 다른데 이 배우 막공이라 특별히 대우해 주고 있다 같은, 잘 모르면 그냥 넘어갈 것들)도 알려줬다. 올해에는 <히스토리 보이즈>, <쇼맨>, <렌트>를 봤는데 모두 재밌었다. 특히 현장감에서 전달되는 힘이 확실히 영화와는 달랐다. 전시는 사내 사진 동아리 활동 로그에서 추천을 받아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요시다 유니의 전시를 봤다. 작가가 구상하는 의미와 세계가 너무 잘 느껴지는 작품들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이런 전시나 서울 일러스트레이션 페어를 가면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예술계가 망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확 온다. 무엇이 의미 있고 옳은지를 스스로 정립하고 그 뜻을 행해나가기 때문에 그 작품들이 숨을 쉬고 빛이 나기 때문이다.


다음은 운전. 해야지 해야지 말만 했던 운전을 차가 생기면서 드디어 시작했다. 내가 산 건 아니고, 아버지가 차를 사셔서 헌 차를 물려받았다. 무려 아이폰이 세상에 등장하기도 전에 출시된 2005년도의 초록색 번호판 자동차. 처음엔 두려움도 살짝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많이 익숙해진 것 같다. 차가 생기니 무엇보다도 여행에서 자유로움이 생겨서 좋다. 전부터 차가 생기면 캠핑을 해봐야지 했었는데 드디어 생겼으니 이제 날이 풀리면 시도해 보려 한다. 운전을 시작하면서 시야의 관점이 바뀌는 게 제일 신기했다. 횡단보도에 있거나 골목길을 다닐 때 저절로 운전자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다니게 됐다. 역시 사람은 글로만 말로만 듣는 것보다 직접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시야가 넓어진 다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음악. 정확히는 밴드 음율. 유튜브 뮤직으로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듣다가 알게 된 밴드였다. 노래 하나만 듣고 바로 팬이 된 적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파도혁명>이라는 곡으로 처음 알게 됐는데 <피차일반>과 <반비례>도 너무 좋아서 몇 달 동안 계속 이 세 곡만 반복해서 들었다. 버스킹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찾아가 CD에 사인도 받았다. JPOP 특유의 박자감도 마음에 들었지만 지금 내 상황에서 힘과 공감이 되는 가사들 덕분에 더욱 마음에 들어왔던 것 같다. 오랜만에 덕질할만큼 마음에 드는 가수를 찾아서 기분이 좋았다.


작년에는 작년 회고록에 썼듯이 행동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도전을 많이 하려고 했었다. 올해는 딱히 그런 방향성을 가지지는 않았는데, 회고하면서 돌이켜 보니 오랜만이거나 새롭게 한 일들도 많았다. 실천에 관성이 생긴 걸까. 올해는 새로운 진로에 대한 고민도 구체화도 많이 했던 해여서, 새로운 도전이라는 기제 자체가 삶에 내장된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개발자를 마지막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든 기회와 확신이 있다면 새로운 단계의 삶으로 넘어가려 한다.  여러 후보가 있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칵테일 바다. 내 칵테일 바를 차리는 건 대학교 때부터 생각했었다. 당시에는 내 아이덴티티 두 개를 꼽으라면 칵테일과 개발자였다. 그래서 이 둘을 합친 로고도 만들고, 내 칵테일바를 차린다면 foo.bar()라는 이름의 개발자 친화적인 컨셉의 바를 차려보고 싶어서라는 가상의 명함도 만들었다.


로고 (좌), 명함 (우)


올해 들어서 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계속 읽고 쓰다 보니 글이 점점 좋아져서, 북바의 형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향적인 성격이라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것도 한몫했다. 조용히 칵테일과 글을 음미하며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나누고 싶었다. 처음 내 개인 칵테일 바를 차리고 싶었던 이유는 내 창작 칵테일들이 메뉴에 있는 바를 차리고 싶어서였다. 같은 느낌으로 만약 북바를 차리게 된다면 책들을 정리해둔 공간이 있을 것이고, 그 곳에 내가 쓴 글이나 책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말 그대로 내가 가득 담긴 공간을 만들고 싶다. 아직 흑백이지만 개발자를 빼고 책의 의미를 더한 로고도 한번 만들어봤다.



하나의 직업도 제대로 갖추고 지키기 어려운데 두 번째를 생각한다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어쩌면 새로운 분야를 시작하기에 이젠 늦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내가 작년에 행동이라는 키워드로 지내보고 올해에도 새로운 것들에 많은 도전을 하면서 느꼈던 것은, 일단 그냥 하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시작하고 도전하는 것에는 특정한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정해진 때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인 예수를 봐도 알 수 있다. 예수는 어릴 때부터 쭉 위대한 삶을 살았을 것 같지만 신기하게도 12살부터 30살 사이 청년기 예수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아주 어린 시절의 잠깐 기록만 있다가 갑자기 30살 어른이 되어 등장한다. 하물며 그 위대한 예수의 서사도 30살이 되어서야 시작하는데, 우리가 과연 어떤 시작의 늦음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 <난 내가 꼭 행복하지 않아도 돼> 책에서는 늦게 시작하는 것에 대해, "늦은 만큼 나아가는 발걸음의 폭이 커졌을 테니까"라고 했다. 언제든 시작을 하기만 한다면, 그 경험치와 그동안 쌓아온 자신을 담을 수 있기에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유현준 교수님께서 유튜브(돈과 꿈에 대하여)에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항상 저한테 요즘에 인터뷰 들어오면 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은 '교수님은 어떻게 건축가가 되셨나요?' 그러면은 '그냥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라고 답을 합니다. (중략) 인터뷰할 때 그렇게 답을 하는 이유는 '저는 열 살 때부터 건축가를 꿈꿔 왔고요, 엄청나게 재능 있는 거 같았고, 그래서 건축가를 꿈꿔왔고 됐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순간 '열 살 때 건축가를 꿈꾸지 않은 사람들은 건축을 하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심어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보거든요.


이 답변이 올해의 나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타당함을 바탕으로 움직이진 않았다. 독학으로 막 넘어지면서도 보드를 타고, 공감 능력이 부족하지만 봉사활동을 하고, 음치에 악기도 거의 안 다뤄봤지만 일단 드럼에 도전하면서 합주도 하고, 뼛속까지 이과생이지만 글과 다양한 문화생활을 탐한다. 어릴 때부터 쌓아온 서사가 없더라도 살아가면서, 흘러가면서, 흥미가 생기고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면 그냥 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괜찮은 한 해였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꽤나 행복한 한 해였다. 자존감도 지금까지 인생에서 올해가 제일 높았던 것 같다.


자기계발서를 보면 작은 도전부터 시작해 작은 성공을 경험하면서 자기효능감을 올리라는 얘기가 종종 나온다. 실제로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해서 좋은 말이라고 생각은 한다. 다만 꼭 성공만 의미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올해 많은 도전을 하면서 가장 크게 배웠던 건, 실패를 해도 생각보다 별 일 일어나지 않다는 것이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도전했다가 실패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기지 않는다. 아무도 모를 수도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는 말도 있듯이, 대부분 일은 생각보다 이 악물고 어떻게든 하면 수습할 만도 하다. 그 수습의 경험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책임만 저버리지 않는다면, 한층 더 성장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올해 새로 팬이 된 밴드 음율의 <피차일반>에 이런 가사가 있다.


언젠가 이뤄낼 미래 그 이상을 상상만 해도 좋잖아
믿지 않는 당신도 내일을 꿈꾸잖아
여전히 다를 게 없네 우린 피차일반이네


그 누구도 미래를 모른다. 어떤 변수와 사건이 내 미래선을 뒤틀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당장의 내일도 과연 예상대로 흘러갈지 장담할 수 없다. 어차피 그런 세상이라면, 내가 주도적으로 만들어는 봐야 덜 억울하지 않을까. 불확실한 미래가 내가 바라는 대로 되길 마냥 두는 것이나, 불확실하더라도 내가 바라는 미래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나, 피차일반이라면 나는 도전을 택하고 싶다. 링컨은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에 중국팀들을 차례로 쓰러트리며 롤드컵에서 우승한 T1도, 메타가 자신에게 맞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조합을 메타로 만들어내면서 대회를 휩쓸었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간에, 행동하면 반성은 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새해에도 후회 없는 한 해를 보내길 바라며. 회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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