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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Jun 04. 2023

자연이 자연스러운 곳

홀로 숲속 독서여행. 이 여행의 시작은 숫자 3의 힘이었다. <드래곤라자>에서 루트에리노 대왕은 아무 약속 없이 하루에 세 번 만나는 사람에겐 목숨도 맡긴다고 했다. 사자성어에도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나도 데이터에서 이상치를 제거할 때 3을 기준으로 많이 쓴다. 한 번은 누구나 그럴 수 있고, 두 번은 우연히 겹칠 수 있다. 하지만 세 번 겹친다면 그건 의미 있는 데이터다. 이번 여행 장소인 썸원스페이지숲도 그랬다. 처음 여기를 알게 되었을 땐 관심 목록에 넣고 언젠가 한번 가봐야지 정도였다. 하지만 서로 다른 세 곳에서 추천을 받자 이건 뭔가 있다는 생각에 일단 예약을 했다.


아늑 그 자체인 혼자만의 방

체크인 가능한 4시에 바로 들어가 힐링하고 싶었지만 직장인에게 주말은 일정들의 테트리스였다. 독서모임을 마치고 김유정역에 도착하자 이미 태양과 눈높이가 맞아가는 시간이었다. 원래는 방에 콕 박혀서 책을 푹 읽을 계획이었다. 체크인을 하고 고양이를 보러 잠깐 나왔다가 이 계획이 산산조각 났다. 계곡 바로 옆도 아닌데 숙소 마당에서 들리는 물소리가 이렇게 생생할 수가 없었다. 스피커가 아닌 진짜 새들의 합창을 듣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공기가 상쾌하다는 느낌을 온 피부로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마당에 책 읽기 좋은 그네도 있었다.


마지막까지 책을 밝혀준 그네의 랜턴

어려서부터 과학실험을 해서 그런지 변수를 통제하려는 편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에 따라 변하는 햇빛도 그랬다. 밝고 싶을 때 어둡고 어둡고 싶을 때 밝은 게 싫었다. 그래서 우리 집 창문은 암막 커튼 너머로 고개를 내밀기 힘들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흐르는 대로 흐르고 싶었다. 자연을 자연스럽게 두고 싶었다. 주황색을 뻗어내던 태양빛은 산을 넘어가는 순간 차가운 파란빛으로 돌변한다. 이 파란빛과 그네의 랜턴이 책 위에 그린 옅은 보랏빛은 말로 이룰 수 없는 경험이었다. 자연의 빛과 자연의 소리 아래에서 책을 읽다 랜턴 빛만 남겨지자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커튼을 걷었다. 아침에 일어나고 싶었다. 아침에 할 일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침에 굳이 일어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아침 자체가 목적이었다. 아침을 겪고 싶었다. 아침 햇빛에 자연스럽게 눈을 뜨고 싶었다. 커튼을 걷으니 은은한 달빛을 보며 잠에 들 수 있는 건 덤이었다.


악필이지만 적어본 페이지

썸숲 최고의 컨텐츠는 무엇일까. 썸숲에는 귀여운 고양이 머루와 달래도 있고 썸장님이 보여주시는 밤하늘도 있다. 그중 최고는 방명록이지 않을까. someone's page라는 숙소 이름처럼, 이 방을 거쳐간 사람들이 한 장 한 장 적어내린 방명록. 작은 책상에 전등을 켜고 앉아 고요히 읽다 보니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시간은 달라도 같은 장소, 같은 공간에 있었을 사람들의 지나간 1년이 느껴졌다. 마치 동기화되면서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이었다. 글을 여러 번 퇴고하면서 고심히 쓰는 편이지만 이날만큼은 지금 드는 느낌 생각 감성 그대로 써내려보고 싶었다. 악필이라 손글씨를 안 좋아하지만 나도 나의 페이지를 하나 채워 넣었다.


영악한 녀석

아침잠이 많은 내가 커튼을 걷었다고 해서 아침에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신기하게도 6시 반쯤에 눈이 떠졌다. 나도 놀랐다. 샤워하면서 몸에 열기를 충전하고 밖으로 나갔다. 아침 새소리는 밤의 새소리와 달랐다. 뻐꾸기 소리도 오랜만에 들어봤다. 자연을 배경음악으로 아침 독서를 하고 있는 데 갑자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었다. 놀아달라는 건가 해서 봤는데 나를 보면서 따라오라는 몸짓을 했다. 따라가보니 공용공간 문 앞에 앉아 당당히 '열어라 휴먼'이라고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열어주니 열심히 아침밥을 먹더라... 영악한 녀석이었다.


체크아웃하면서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 1박은 짧다. 다음에는 휴가를 써서라도 꼭 2박 이상 오고 싶다. 방명록에도 이런 말이 많았던걸 보면 다들 비슷한 느낌이었나 보다. 이번 여행에서는 거의 그네에 앉아 자연 소리를 배경으로 책만 읽었다. 오랜만에 들은 자연 소리가 너무 좋았나 보다. 다음에 오면 주변 산책도 해보고 싶다. 근처 동네 서점도 가보고 싶다. 아마 그때쯤이면 계절이 바뀌었을 테니 새로 단장했을 풍경과 소리도 궁금하다. 꼭 다시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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