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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May 30. 2023

내가 공부를 했던 마음

"성장 과정에서 영향을 미친 어린 시절의 경험이 있나요?"


<어린이라는 세계>라는 책으로 진행했던 독서모임에서 받은 질문이다. 기억력이 안 좋아서 지난주의 일도 가물가물한데, 학생 때도 아닌 어린 시절의 기억이 뭐가 있을까. 한참 고민을 하다 문득 떠오른 사건이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든 사건.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영재고, 서울대라는 학업 성취의 시작이 된 사건. 바로 학원에서 선생님이 해줬던 한마디의 말이었다.


선생님의 한마디에 정신 차리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하면 감명 깊은 조언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정반대였다. 좋은 말도 아니었고 나에게 해준 말도 아니었다. 아마 초등학생 때였을 것이다. 그 나이대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공부하기 싫었던 나는 학원에서 친구와 딴짓하며 떠들고 있었다. 그러다가 선생님한테 걸렸다. 그리고 나랑 같이 떠들었던 친구에게 한마디 하셨다.


"OO(나)는 잘 하니깐 괜찮아. 하지만 넌 떠들면 안 되지."


충격적이었다. 사실 좋은 선생님의 태도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린 내게 학업 성취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는 것을 처음으로 경험시켜준 일이었다. 심지어 이 학원은 주기적으로 보는 시험의 결과를 실명으로 복도 벽에 붙여두었다. 이런 환경에서 오는 인정과 대우의 변화가, 내가 처음으로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였다.


세상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듯 마음먹었다고 해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암기력과 꼼꼼함이 부족해 내신을 잘 챙기지 못했다. 특히 사회 같은 과목은 전교 600등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이러다가 일반고를 가면 죽도 밥도 안 되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어떻게든 그나마 좋아했던 수학과학 쪽으로 진로를 뚫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늦었다. 빠른 아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한다는데, 내가 특목고의 존재를 자각했을 땐 이미 중2였다. 그래서 나는 학교와 잠을 포기했다. 학교에서는 수업보단 특목고 준비나 차라리 부족한 잠을 보충했고, 끝나면 바로 학원으로 가서 새벽까지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학교 선생님들께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당시에는 정말 특목고에 가지 못하면 인생이 망한다는 각오로 했었다. 그 각오에 하늘이 답해주었는지 운 좋게도 영재고에 합격할 수 있었다.


이 작은 성공으로 자만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 사실 좀 똑똑한 게 아닐까. 뭐든 하면 할 수 있는 사람인가? 하지만 전국에서 모인 천재들을 보고 이 자신감은 바로 산산조각 났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표현이 나를 위해 나온 건가 싶을 정도였다. 나는 노력하고 그 친구는 놀아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하는 친구가 노력도 열심히 하는 걸 봤을 땐 좌절했다. 어차피 이기지도 못할 싸움, 공부가 하기 싫었다. 공부하기 싫은 학생이 자습시간에 합법적으로 딴짓을 할 수 있는 수단은 책이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기 시작했다. 수학과학은 꼴도 보기 싫어서 사회, 심리, 철학과 관련된 책만 골라 읽었다. 그러다가 본 <리얼리티 트랜서핑>에서 읽은 구절에 뒤통수를 한 대 맞았다. 오래돼서 정확히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남을 이김으로써 자신이 뛰어남을 인지하는 자는 옆에 문이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창문을 깨고 나가야 밖에 나갔음을 인지하는 파리와 같다.

바딤 젤란드, <리얼리티 트랜서핑>


그래서 목표를 바꿨다. 남을 이기는 게 아니라 나를 이기기로. 주변 사람과 상관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로. 어제보다 앞으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면 더 빨리, 더 많이 나아가기로. 그렇게 앞만 보고 나아가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서울대에 와 있었다.


대학교 땐 솔직히 펑펑 놀았다. 학창 시절에 대한 보상심리였던 것 같다. 첫 학기 땐 술을 마신 날이 술을 마시지 않는 날보다 많을 정도였다. 특히 칵테일 동아리와 펌프엔 거의 인생을 바치다시피 했다. 초기에는 영재고에서 미리 배웠던 것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성적이 나왔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밑천이 드러나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꼈을 땐 이미 노는 것에 관성이 생겨벼렸다.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설득되지 않으면 안 하는 게 기본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이런 마음가짐은 내가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덕분에 앞으로의 인생 설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고, 경제나 미대 등 다른 과 전공 수업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서슴없이 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부만 하면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개발자들이 모여있는 특이한 부대에서 근무를 했었는데, 거기서 다양한 분야와 다양한 상황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그냥 공부를 한다고 만사 오케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만 그냥 공부를 한다고 해서 세상이 수고했다고 알아주지 않는다. 수요와 공급은 냉정했고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남들이 보기에 좋은 공부를 해야 했다. 최소한 그렇게 포장할 구실은 있어야 했다. 그래도 내가 개발이라는 분야 자체를 좋아해서 싫은 걸 억지로 하지는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린 날의 추억에서 시작했다가 어쩌다 보니 학업 일대기가 되어버렸다. 지금도 공부를 하냐고 하면 사실 애매하다. 물론 개발자는 평생 공부해야 되는 직업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차근차근 공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일을 해결하기보단, 일단 일이 먼저 생기고 이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지식들을 단편적으로 빠르게 우겨넣는 느낌이 강하다. 대신 일이 아닌 곳에서 배워보려는 건 많다. 글쓰기, 클라이밍, 베이스 등등. 그냥 좋아서 해보고 싶은 것들. 생산성하고는 전혀 관련이 없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쓸모없는 것들이다. 이런 거 배워서 어디에 쓰냐고 불평했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는 굳이 쓸데없는 것들을 배우려는 걸 보면 역시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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