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행복한가. 갑자기 이런 주제를 꺼내는 이유는 내겐 올해가 꽤나 행복한 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올해 행복하다고 느꼈는지 생각해 봤고,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목표를 버렸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목표를 버림으로써 얻는 행복에 대해 풀어내보고자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에는 보통 수식어가 붙는다. 많은 재산, 뛰어난 개발자, 좋은 사람과의 결혼, 편안한 노후. 하지만 이런 수식어는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비교우위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이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이유라면 상위권에 속하는 소수만이 행복할 수 있다. 혹은 그들도 정말 1등이 아니라면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들을 평생 바라보기만 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저런 목표들은 게임과는 달리 결과만 있을 뿐 달성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이 얼마나 답이 없는가. 그래서 목표의 성취보단 다른 방향성을 가져보고자 했다. 그냥 이렇게만 말하면 어린 아이의 푸념처럼 들릴 것 같으니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허준이 교수님의 졸업식 축사를 인용해 보자.
제로섬 상대평가의 몇 가지 퉁명스러운 기준을 따른다면, 일부만이 예외적으로 성공할 것입니다. (중략) 취업 준비, 결혼 준비, 육아 교육 승진 은퇴 노후 준비를 거쳐 어디 병원 그럴듯한 일인실에서 사망하기 위한 준비에 산만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례와 혐오와 경쟁과 분열과 비교와 나태와 허무의 달콤함에 길들지 말길,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을 이겨내고 하루하루를 온전히 경험하길, 그 끝에서 오래 기다리고 있는 낯선 나를 아무 아쉬움 없이 맞이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을 하던 와중 아이유의 <팔레트>를 듣다가 가사 한 조각이 날아와 가슴에 박혔다.
그림보다 빼곡히 채운 palette, 일기
그림이란 것은 완성된 결과물이므로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라 볼 수 있다. 이에 비추어보면 팔레트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쓰이는 물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목표를 완성하기 위해 살아가는 하루하루라고 볼 수 있다. 천재적인 화가라 해도 언제나 좋은 그림만을 그릴 순 없다. 더군다나 요즘 장르소설에서 유행하는 것처럼 회귀해서 인생 2회차를 사는 게 아닌 이상 우리는 모두 그림을 처음 그려본다. 당연히 이상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리고자 했던 것을 완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너무 완성도만 바라보지 말고 잠깐 옆을 돌아보면, 하루하루의 온전한 경험으로 빼곡히 채워진 팔레트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다채롭고 아름다울 수 있다. 그렇기에 가사에서 pallete 다음에 이어지는 단어가 하루하루를 기록하는 일기가 아니었을까 감히 추측해 본다.
물론 그래서 목표를 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막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더 발전하고 나아가기 위해서 무언가 장치는 있어야 한다. 나는 그래서 키워드를 가지기로 했다. 목표와 키워드의 차이는 게임에서 캐릭터를 이동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쉽다. 3인칭 게임에서 캐릭터를 움직이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스타크래프트나 LOL처럼 내가 도착하고자 하는 곳을 클릭하면 그 위치로 캐릭터가 이동하는 목적지 지정 방식이 있고, 게임패드나 방향 키로 방향을 지시하면 그 방향으로 움직이는 방향 지정 방식이 있다. 여기서 목표는 목적지 지정 방식에 가깝고 키워드는 방향 지정 방식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맵이 모두 까맣게 안개로 덮여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어떻게 되고자 하는 것은 있지만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도 잘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는 목표보다는, 결과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가고자 하는 방향에서는 확실하게 한 발짝씩 나아갈 수 있는 키워드를 가지기로 했다. 목표는 멀리 목적지만 바라본 채 걸어가느라 오늘 하루하루가 그 목표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기 힘들다. 그렇게 오늘 하루의 쓸모를 생각하다 자책하게 되는 것을 축사에서 '의미와 무의미의 온갖 폭력'이라고 표현한 게 아니었을까 싶다. 이에 비해 키워드는 지금 나아가는 방향성을 제시해 주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온전하게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올해의 키워드는 행동이었다. 그렇게 행동이라는 키워드 아래에서 만들어진 고양이 카페에서 책을 읽는 하루, 하기 싫은 아침 운동을 해낸 하루, 4년 만에 칵테일 클래스를 연 하루, 내 글이 조회 수 1만 회를 달성한 하루, 이러한 하루들의 온전한 경험들이 올해의 나를 뿌듯하고 행복하게 만든 것 같다. 이렇게 하루하루 달라지고 나아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지 않을까?
생각이라는 게 그렇듯이 내년에는 또 행복에 대한 기준이 바뀔 수도 있다. 그래도 올해에는 이러한 생각과 키워드 덕분에 행복한 한 해를 보낼 수 있었다. 다들 행복한 한 해를 보냈길, 그리고 내년에도 행복한 한 해를 보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