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취미가 많다. 하지만 취미가 많다 보니 모든 것을 잘 챙기지는 못한다. 뜨개질도 그중 하나였다. 할 줄 안다고 말은 여기저기 하고 다닌 것에 비해 안 한 지 3~4년은 넘은 것 같다. 그래서 오랜만에 뜨개질을 해보기로 했다. 어떤 것을 만들지 고민하다가 목도리는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목도리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런 뜨개질과 관련해서 도안과 필요한 색의 실까지 딱 세트로 나오는 상품들이 있다고는 들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설계해서 만드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어떤 목도리를 만들지부터 생각해 봐야 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은 보라색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밝고 튀는 색보다는 차분한 느낌의 색이 더 잘 어울린다. 그래서 보라색과 친척이면서도 차분한 느낌이 드는 자주색을 메인으로 잡았다. 자주색을 고르고 보니 초록색이랑 조합하면 딱 크리스마스 느낌이었다. 그래서 이 두 색을 바탕으로 크리스마스 컨셉인 목도리를 떠보기로 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도 없었다. 하지만 무늬를 고르는 과정이 문제였다. 일반적인 목도리 뜨기라 하면 보통 꽈배기 무늬를 넣거나 가로로 색을 섞어서 뜬다. 하지만 이 두 기법은 이전에 해보기도 했고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봐도 너무 흔하다. 갑자기 다들 하는 건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 모를 반항심 같은 게 생겼다. 그래서 세로로 색을 넣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들 안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이도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9개의 실을 병렬로 뜨다 보니 계속 실을 바꾸고 볼 위치를 컨트롤하는 작업이 들어가게 되었고, 여기서 오는 시간 소모가 컸다. 뜨던 도중에 이걸 깨닫고 ‘context switching 비용이 너무 큰데?’라고 생각했다가 나는 진짜 개발자가 맞구나 하고 피식하기도 했다. 이전에 뜨던 속도를 생각하면 넉넉잡아도 2~3 주면 뜨겠지 하고 11월 말에 시작했다가 크리스마스 전에 완성하지 못할 뻔했다.
크리스마스 당일에야 겨우 완성했다
생각해 보면 전부터 다들 하는 걸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참 싫어했다. 이전에 POE나 로스트아크 같은 게임을 할 때도 다른 사람들이 잘 설명해둔 가이드가 많아도 꼭 나만의 빌드를 어떻게든 만들어내려고 연구했다. 칵테일이나 향수를 창작해서 만들려는 것도 비슷한 느낌인 것 같다. 계속 이런 노선을 타다 보니 주변에서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다들 안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텐데 왜 사서 고생이냐고 한 적도 있었다. 물론 실제로 이런 성격 때문에 시간도 많이 날리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이번 일만 봐도 이 말을 들었으면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완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지 못한 것을 내가 찾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기에 계속해서 새로운 방법에 도전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사서 고생하면서 부딪혀보는 이유에는 다른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내가 선택한 것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말만 듣기보다는 내가 직접 몸으로 경험해 보고 깨달아야 납득이 되는 편이다. 말 그대로 ‘체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결론이 실패라 해도 난 그 실패를 깨닫는 과정조차도 즐겁다. 이번에도 결론적으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다음에는 이렇게 세로로 색을 넣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도 거의 설명이 없던 새로운 기법을 혼자 탐구해나가면서 나름대로 그나마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실 볼 동선이나 다른 색의 실이 잘 얽히도록 할 수 있는 방법 등이 점점 터득되는 과정이 너무 재밌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이렇게 직접 몸소 탐구하고 배우면서 내가 발전하는 것을 체감하는 과정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운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분야를 깊게 파는 스페셜리스트는 잘 되지 못하는 편이다. 50점인 아이가 80점을 받는 것보다 90점인 아이가 95점이 되는 것이 훨씬 어려운 것처럼, 어떤 분야든 상관없이 점점 수준이 높아질수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워진다. 즉, 같은 시간과 노력을 써도 내가 발전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 점점 어려워진다. 그러다 보면 그 분야에 대한 탐구를 계속 해나갈 힘이 점점 빠지는 것 같다. 대신 여러 분야를 넓게 탐험하는 제너럴리스트에는 완벽한 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분야를 접하면 탐구하고 배울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접하는 데에 두려움이 없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내가 잘 모르는 분야를 계속 찾아나가려 하는 편이다. 취미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올해만 해도 인테리어, 패션, 글쓰기 등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분야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깨닫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다. 이처럼 어느 궤도에 오른 후 안주하기보단 내가 배워나갈 수 있는 부분을 계속해서 찾아 나서고, 이를 탐구하면서 내가 발전해 나간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내 삶의 원동력인 것 같다. 나는 평생 사서 고생할 운명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