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있었던 독서모임에서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죽음에 대해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분을 오랜만에 만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다. 일상이나 혹은 이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독서모임에서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꺼내지지 않거나 어쩌다 나와도 어영부영 넘어가곤 한다. 죽음이라는 개념이 함부로 다루면 안 되는 민감한 주제라는 인식도 있고, 잘못 말을 꺼냈다가 '혹시 요즘 사는 게 힘드니?' 같은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가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면 죽음에 대해서도 같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죽을 생각을 하는 것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작년에 있었던 독서모임에서 삶의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한 분이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막막하다는 얘기를 하신 적이 있다. 나는 이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면 더 쉬워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내 마지막 모습은 어떨지. 나는 사람들에게, 혹은 세상에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 내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내 묘비에는 어떤 말이 적힐 것인지. 무엇을 남기고 죽고 싶은지. 이런 고민을 먼저 해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가치관과 생각, 그리고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갈지 정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내 경험을 토대로 한 조언이었을 뿐, 이런 죽음에 대한 고민이 왜 도움 되는지에, 그리고 실제로 도움이 될지에 대해서도 명확하지 못했다. 오늘도 집에 오는 길에 그 이유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다가 의외의 곳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며칠 전 슈카월드의 <재테크, 지금도 늦었다> 영상을 본 뒤로 (슈카님이 재테크라는 단어를 안 좋아한다는 것에 동감하며) 개인 자산 운용에 관심이 많아졌다. 이와 관련된 다양한 출처의 자료들을 공부하면서 살펴보니, 다들 공통적으로 우선 돈을 모으려는 목적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목적을 명확히 하려면 우리는 두 가지의 끝에 대해 생각을 해봐야 한다. 바로 돈을 벌 수 있는 기간의 끝과 삶의 끝에 대해서다.
요즘 청년들의 사회 진출 나이가 점점 늦춰진다고 하지만 좋게 생각해서 25세에 돈을 벌기 시작했다고 하자. 그리고 평균 퇴직 연령도 최근에 50세 미만이 되었다고 하지만 넉넉히 55세 정도라고 해보자. 그러면 우리는 일반적인 경우 30년 정도 돈을 벌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평균 연령은 85세를 훌쩍 넘겼다. 즉, 돈을 버는 기간보다 돈을 벌지 않는 기간이 더 길다. 그리고 이 돈을 버는 기간 대비 돈을 벌지 못하는 기간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흔히 말하는 노후 대비를 해야 하고, 이러한 현금 흐름을 만들기 위해 개인 자산 운용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몇 살에 일을 끝내고 몇 살에 죽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퇴직 후 어느 정도의 현금 흐름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지 고민하고, 이에 따라 언제부터 얼마의 수익률을 목표로 하고 리스크는 어느 수준으로 관리해야 하는지 설계하는 게 개인 자산 운용의 시작이라고 한다. 끝에 대한 생각을 배제한 채 당장의 집을 사고 싶어서, 결혼 자금이 필요해서, 혹은 단순히 많이 벌고 싶어서 같은 이유로는 명확한 자산 운용을 설계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먼저 해야 삶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것 자체의 거부감도 있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면 '어차피 다 죽을 건데 무슨 의미가 있나'하며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오히려 삶에 안정감을 심어준다고 생각한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에서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의 가장 큰 효과는 아마 나일 강변에서 술을 마시든, 책을 쓰든, 돈을 벌든, 우리가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로부터 가장 중요한 일로 시선을 돌리게 해준다는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덜 의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죽어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 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알랭 드 보통, <불안>
내가 존재와 죽음에 대해 처음으로 고민하게 해준 책 <드래곤 라자>에서 죽음에 대한 이런 대화가 있다.
"축제를 앞둔 농부는 몇 배로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이다. 약속된 휴식이 있으니까. 그리고 우리에겐 죽음이라는 약속된 휴식이 있다. 따라서 몇 배로 맹렬하게 살아갈 수 있다."
"휴식이 약속되어... 죽음이?"
"그렇지요.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지요."
"그럼 죽음이 축제라는 말이에요?"
"축제가 일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일상의 괴로움을 모두 잊고 자신마저도 잊을 수 있는 의미에서의 축제라면 죽음은 곧 축제인 셈이지요"
"... 너무 어려워요."
이영도, <드래곤 라자>
'평생'이라는 단어에 기시감이 들 때가 있다. '평생'과 '일생'은 똑같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의미하는 단어인데, 일생은 유한하게 느껴지는 반면 평생은 마치 영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런 영원 같은 끝없는 굴레의 느낌 때문에 미래에 대한 고민이 때로는 막연히 두렵게, 혹은 허무하고 나태해지게 되는 것 같다. 끝이 있기 때문에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한쪽 면이 무너진 상자에는 물건을 담을 수 없듯이, 우리의 삶은 유한하기 때문에 더 안정감 있고 알차게 채워나갈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