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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May 13. 2024

안녕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어버이날을 맞아 부모님께 편지를 써보려 했다. 단정한 느낌의 편지지를 사서 책상에 두고 펜을 들었다. 한참을 앉아 있었지만 결국 한 문장도 나아가지 못했다. 주변에 열심히 글쓰기를 전파하고 다니지만, 예전부터 쓰기 어려운 글들이 있었다. 편지, 댓글이나 댓글에 대한 대댓글, 후기나 리뷰 같은 글들. 영혼 없는 상투적인 말들을 쓰긴 싫은데, 대상이 명확한 글에 주관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부담이 생겨서 머릿속이 엉켜버린다.


독서모임에서 여행에 대한 얘기했을 때 자연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 적이 있다. 사람이 만든 것들에 대해서는 내 감상이 혹시나 잘 모르거나 잘못 이해한 부분 때문에 곡해하는 부분이 있을까 봐, 혼자 속으로만 생각한다 해도 불안감과 죄책감 사이 어딘가의 감정이 미묘하게 생긴다. 그에 비해 자연에는 주체나 의도가 없기에, 그 속에서 오롯이 마음 편하게 누릴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종류의 글들도, 내게는 마치 감상문을 낭독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 부담이 된다. 더 넓은 일반적인 대상, 혹은 인간이 아닌 대상, 혹은 차라리 나를 주제로 해서 쓰는 글들이 훨씬 잘 써진다. 개그맨들이 자칫 논란이 될까 봐 차라리 자학개그를 하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같은 느낌인 걸까.


브런치나 블로그에서 다른 분들의 글을 보다 보면 내 글은 읽기 불편한 글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파트별로 소제목을 짓거나 이미지를 잘 활용하는 편도 아니고, 글자에 크기/색/밑줄 등으로 강조를 하지도 않는다. 그저 줄글만 쭉 적어내리는데, 사실 어느 정도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쓴다. 하나하나 내 아이 같은 문장들에 우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독자를 의식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있다. 혹여 누군가 읽는다는 게 계속 의식이 되면 부담이 생겨 글쓰기를 지속하지 못할까 봐, 그냥 독백하는 느낌으로 쭉 써내린다. 그러면서도 발행 버튼은 꾸준히 누르는 걸 보면 사람은 역시 모순 덩어리다.


다시 붙일 수 없는 것처럼 관계가 부서질 때마다 다는 예전에 그 애가 들려준 얘를 떠올렸다. 그 애는 어느 날 친구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했다.
내가 이 관계를 오랫동안 지킬 수 있을까?
지키긴 뭘 지켜. 관계는 누리는 거지
돌아온 말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고 했다.

민바람, <낱말의 장면들>


민바람 작가님의 <낱말의 장면들>을 읽다가 뒤통수를 한대 맞았던 부분. 이 부분을 읽고 한참을 생각한 뒤에도, 그리고 이 책으로 했던 독서모임에서 사람들과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후에도, 나는 과연 관계를 마음 편히 누릴 수 있는 사람일까 의문이 들었다. 인지적 공감은 있어도 감정적 공감은 부족해서 학습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누군가에게 무례하거나 상처를 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란 걸 잘 알기에,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내 행동을 검수하곤 한다. 내게 인간관계란 이 집중이 자칫 흐트러지는 순간 무너질 수 있는 줄타기 같아서, 지켜야 한다고 계속 의식해야 되는 존재다.


인간관계가 참 어려운 게, 오래 되고 깊은 관계라고 튼튼해지진 않는다. 예전에 친구에게 연애상담을 했을 때, 연인관계야 말로 서로 가장 밀접하게 닿아있기 때문에 작은 진동에도 더 쉽게 흔들리고 깨질 수 있는 관계라고 했다. 그래서 가족이나 연인 같은 관계는 오히려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약간은 먼 관계, 흔히 '지인'이라고 부르는 정도의 관계는 서로 잘 모르는 만큼 오해가 만들어지기도 쉽기에, 지키려는 노력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다가, 내게 친구라는 관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깎으면서 미용사 분과 스몰토크를 하다가 중학교 친구들과 아직도 연락을 하고 놀러 가기도 한다는 이야기했더니 신기해하셨다. 그때 결성된 10명이 넘는 그룹이 아직도 활발하게 연락한다는 말에 놀라시는 분들이 많다. 돌이켜보니 인간관계에 그렇게 피곤해하고 에너지를 소모하면서, 살면서 지나쳤던 집단(초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에서 모두 마음이 맞는 그룹이 생겼고 매년 두세 번씩은 만날 정도로 지속하고 있다. 어쩌면 내게는 지키는 관계와 누리는 관계가 따로 있고, 친구들이야말로 누리는 관계이기에 지속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계를 누린다는 건 어떤 걸까. 어렴풋한 알듯 말듯 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고민을 하다가 이영도 작가님의 <드래곤 라자>의 한 부분이 떠올랐다.


"설명하기가 힘들어. 어쨌든, 이루릴의 말을 듣고 있자면 우리가 생각하는 예의범절이라든가 훌륭한 문화 같은 것이, 모조리 서로에 대해 잘 알 수 없어서 불안한 인간 종족의 슬픔 때문에 생겨난 것 같아. 아무런 의미도 없이 건네는 인사말, '좋은 아침입니다!' 마저도 서로 원수가 되지 않기 위해 외치는 말 같다구. 젠장."

"뭐? 원수?"

"그러니까... '나는 이 아침을 즐기고 있는데 당신도 그렇지 않느냐?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것을 즐기니 서로에게 화낼 필요가 없다. 되도록 유쾌하게 지내보자.' 이런 식으로. 그러면 상대도 똑같이 대답하지. '좋은 아침입니다!' 사실 상대는 오늘 아침 변비 때문에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지만, 인사를 건넨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기 싫어서, 서로 나쁜 관계가 되기 싫어서 그냥 타성적으로 대답하는 거지. 우린 상대를 이해하지 못 하기 때문에, 그래, 그거야. 우린 상대를 모르기 때문에, 결국 서로를 위해 타성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거지... 나와 대단히 친한 사람이 아니라면, '얼어 죽을, 뭐가 좋은 아침이야?' 따위로는 말하지 않는 거지... 우리는 죽을 때까지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결국 우리의 말과 행동의 상당 부분은 거짓말이나 가식이 되지. 예의범절이란, 잘 조절된 거짓말. 그런 것 같아..."

이영도, <드래곤 라자>


이 대화에 빗대어 생각해 보면, 어쩌면 누릴 수 있는 관계란 누군가 인사를 했을 때 "난 안녕 못하는데?", 혹은 "안녕 못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말해도 상대방도 서로를 믿고 잘 알기에 별 의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리고 내 인사에 상대방이 안녕 못한다고 해도 나 또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관계지 않을까. 나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내게 친구들은 이렇게 가족과는 또 다른 특별한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는 관계들이기에,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고 그들을 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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