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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Jun 05. 2024

없는 것들에 대한 단상

Digitine. Digital과 Guillotine의 합성어로 우리말로 하면 디지털 단두대. 최근에 틱톡에서 시작된 새로운 캔슬 컬처로, 캔슬 컬처란 잘못된 언행을 한 유명인이나 브랜드를 대상으로 보이콧하는 문화를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불매 운동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불매 운동은 구매 행위를 중단해서 금전적인 영향을 끼치는 반면, 디지털 단두대는 구독, 팔로우 등의 취소를 통해 의지를 나타낸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존의 불매 운동에서 방식만 온라인으로 옮겼을 뿐 별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디지털 단두대는 다른 캔슬 컬처와는 사뭇 다르다. 잘못된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화두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대해 영향력이 있는 사람임에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처형식이 디지털 단두대의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이 단어가 생기기 전에도 비슷한 모습을 봤다. 유튜버 <슈카 월드>를 자주 챙겨 보는데 몇 달 전부터 "왜 금투세에 대해서는 입 꾹 닫고 있냐"라는 내용의 댓글들이 계속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금투세에 관심이 많았기에 이야기를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다루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한다는 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영상의 내용과 상관없이 계속 달리는 댓글을 보자 삐뚤어진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들이 원하는 건 상대방의 의견일까, 본인 의견의 지지자일까, 물어뜯을 대상일까. 사실 어려운 문제다.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로 시작하는 유명한 구절이 있듯이 침묵이 항상 옳다고 볼 순 없다. 그렇다고 해 행동 없음에 대한 처벌을 내리는 건 옳은 현상일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은 이제 인플루언서들에겐 통하지 않는다. 어릴 땐 유명해지는 상상을 하면 두근거렸다. 이제는 유명해지는 상상을 하면 두렵다. 근거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생각해 보면 없는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게 그리 어색한 일은 아니다. 세상에 온기는 있어도 냉기라는 건 없다. 상대적인 열의 차이를 느끼는 것뿐이다. 어둠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빛의 부재일 뿐이다. 그림자 또한 그림자가 있는 게 아니라 그 부분을 제외한 모든 곳에 빛이 닿는 현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정의하여 일상 속에 존재시켰다. 이러한 개념적 정의 외에도 없는 것들은 생각보다 쉽게 실존될 수 있다. 우리는 부재의 증명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몬스터나 외계인에 대해서 그 누구도 없다고 증명할 순 없다.


하지만 실존하면서 없는 것들은 때론 너무나 쉽게 외면받는다. 미국 메사추세스주에서 듀카키스 주지사는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에게 특정 조건에 따라 제한된 외출/외박을 허용하는 귀휴 제도를 도입했다. 귀휴를 다녀온 수감자들은 재범률이 기존 31%에서 12% 수준으로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윌리 호턴이 귀휴 중 범죄를 저지르는 사건이 일어났고, 추후에 듀카키스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상대 진영이었던 부시는 이를 빌미로 공격했다. 윌리 호턴이 저지른 범죄의 피해자에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격분했지만 19%의 발생하지 않은 피해자들에겐 아무도 공감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치상에만 있는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김영하: 저도 개인적으로 약간 경계하는 것 중에 하나는 정의감이 들 때 좀 조심해요. 이 정의감이 어디서 왔지 이거 좀 알아봐야 돼요. 마녀사냥도 마찬가지예요. 이 사람부터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사람들의 정의감을 건드렸을 거예요.
(중략)
김상욱: 정의감이라는 말이 뭔가 옳다, 의롭다는 말인데, 굉장히 위험한 말이거든요? 옳은 게 있으면 옳지 않은 게 있다는 거라서, 그걸 누가 규정하는지가 중요한 거지 정의감만 추구한다고 되는 게 아니어서, 전두환 정권이 내건 모토가 정의 사회 구현 이었잖아요?
(중략)
김영하: 그리고 사실 정의롭게 우리가 살거나 행동한다는 게 간단할 리가 없거든요. 정의라는 마약에 쉽게 취하면 안 되고...

<알쓸인잡 EP7 - 인류의 흑역사>, https://www.youtube.com/watch?v=xgcQSuXvnOA&t=732s


옳음을 추구하려 하지만 완벽한 옳음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구심이 종종 들곤 한다. 하나 확실한 건 지속적으로 의심하면서 완성도를 높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며칠 전 생애 두 번째로 선하다는 말을 들었다. 두 번째로 들어도 여전히 어색한 말. 이전에는 거부감이 먼저 들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이런 말에 안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지금 모습을 좋게 봐주신 건 당연히 감사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변화해야 한다고. 칭찬을 좋게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습관은 여전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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