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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타 May 04. 2024

빨대의 구멍은 몇 개일까

우연히 빨대 구멍의 개수를 물어보는 쇼츠를 봤다. 빨대의 구멍은 몇 개일까. 별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눌렀는데 보고 나서 의외로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이 질문을 받고서 5초 안에 대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아마 1개라는 대답이 바로 나왔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과생이다 보니 위상수학 개념에서 빨대나 도넛이나 머그컵이나 다 똑같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빨대의 구멍은 몇 개라고 해야 할까?"로 바꾸고 충분히 고민해 보니 다른 대답이 나왔다.


"몇 개일까"와 "몇 개라고 해야 할까"는 비슷한 듯 사뭇 다르다. "몇 개일까"는 그 질문을 들었을 때 드는 생각을 그대로 말하게 되는 반면, "몇 개라고 해야 할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먼저 대답을 생각해 본 다음에 그 대답이 정말 괜찮은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작은 질문의 차이는 생각보다 큰 결과의 차이를 만들 수도 있다. 일례로 chatGPT처럼 질문을 하면 대답을 생성해 주는 AI에 관련된 연구 중, 다른 추가적인 개선 없이 단순히 질문 끝에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Let's Think Step by Step)" 한 문장을 추가했더니 성능이 4배 이상 상승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기사, 논문).


AI 말고 사람의 경우를 보면, 나는 이렇게 한 단계가 더 생기면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듣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어떤 질문에 대답을 할 때 듣는 사람을 고려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내용은 리처드 파인만 교수님의 "자석은 왜 서로 밀어내는가?"에 대해 답변하는 영상(물리 지식이 꼭 필요한 영상은 아니니 한 번쯤 꼭 보시길 추천합니다)을 첨부해두고 일단 넘어가자. 다시 원 질문으로 돌아와서, 그렇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위상수학은 너무 일반적이지 못한 개념이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구멍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다. 뚫어지거나 파낸 자리. 땅을 파낸 곳도 위상수학에서는 평지와 다를 바 없지만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구멍이라 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빨대를 양쪽에서 파낸 구멍이 만난 모양이라 본다면, 구멍이 2개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이래저래 생각해 본 답변들 중에는 구멍의 다른 의미로 해석해 본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구멍의 의미 중에는 '허점이나 약점을 비유적으로 이루는 말'도 있다. "내가 팀의 구멍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해볼게" 같은 표현에서 쓰이는 구멍이다. 빨대의 가운데 있는 공간은 액체류를 흘려보내기 위한,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에 매우 적합하고 필요한 형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빨대에는 구멍이 없다고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생각이 느린 편이다. 위에서 '빨대의 구멍은 몇 개일까'하는 간단한 질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바로 한 대답이랑 충분히 생각하고 한 대답이 많이 달라진다. 독서모임을 할 때 내가 주최하는 모임에서는 발제문을 준비하고 미리 공유하는 이유도, 일단 내가 그래야 더 깊은 내용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고 혹시 나와 같은 사람이 또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서모임은 정해진 질문만 나누고 끝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생각들을 뻗어 펼쳐나가다 보면 즉석에서 드는 생각을 말하는 상황도 많이 생긴다. 오는 길에 그날 모임에서 했던 대화를 혼자 곱씹어 보다가, '지금 같은 질문을 물어보면 더 좋은 대답을 할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 생각들은 보관함에 차곡차곡 쌓였다가, 글을 쓸 때 꺼내서 재료가 되곤 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 이런 생각들이 사라지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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