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이라는 말이 내가 학생일 때부터 돌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사람은 받은 것보다 당한 것을 더 강하게 인식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치안, 의료, 위생, 인터넷, 교통이나 배달 인프라 등을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선진국들과 비교해 봐도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다. OECD 등에서 다양한 부정적인 지표에서 순위권을 차지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투표나 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가 헬이 된다 해도 주위 사람 잘 챙기면서 내 한 몸 올바르게 살아가면 충분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동안의 고찰도 '어떻게 해야 내가 옳은 삶을 살 수 있을까'에 집중했지 '어떻게 해야 옳은 사회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0.7 그리고 0.6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는 말도 안 되는 합계출산율은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왜 합계출산율이 낮을까. 천정부지로 치솟는 아파트 가격, 사교육비를 포함한 막대한 양육비, 기업의 제도 등 다양한 원인이 거론된다. 나는 이 내용들은 모두 더 근본적인 원인에서 결과적으로 나온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합계출산율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다양한 문제들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분열과 갈등, 그리고 이로 인한 경쟁과 비교라고 생각한다. <공감의 반경>에서도 우리나라 저출산의 원인으로 갈등과 경쟁을 꼽으면서 경쟁과 갈등이 심화될수록 생애사 전략에서 번식보다는 성장을 선택하게 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실제로 Ipsos에서 28개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문화적 분열 관련 보고서에서 우리나라는 12개 항목 중 7개(빈부, 정치, 이념, 종교, 남녀, 학력(대졸), 세대)에서 1위, 사회적 계급은 2위, 도시/시골과 엘리트/일반노동자 에서는 3위를 차지했다. 우리나라가 순위가 낮은 건 민족과 이민자뿐이었는데 단일 민족 국가임을 생각해 보면 갈등이 생길 수 있는 부분에서 모두 극단적으로 싸우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분열과 갈등, 경쟁과 비교의 사회가 되었을까. 위에서 언급한 <공감의 반경>에서는 학습 열망이 원인이라고 했다. 유튜브 <슈카 월드>나 <너진똑>에서는 돈, 즉 물질만능주의가 원인이라고 했다. 나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나는 정치와 종교가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감히 말하자면, 작금의 정치는 간접민주주의에서 나올 수 있는 최악의 행태를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투표를 통해 내 의사를 대표해 줄 사람, 우리나라로 치면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선출하고 이들이 정치를 하는 간접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정치에서 똑같은 패턴만 들려오고 있다. 야당의 안건이 상정되고, 여당은 필리버스터를 시작하고, 야당은 필리버스터 강제 종결(3/5 이상 동의 필요) 후 표결에서 통과시킨다. 이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행사하고, 재의결(2/3 이상 동의 필요)에서 부결되어 안건은 폐지되고, 야당은 조금만 바꿔서 재상정시킨 뒤 다시 위의 단계가 반복된다. 여기서 필리버스터 종결 표결, 안건 표결, 재의요구권, 재의결 표결은 모두 투표를 통해 부여된 자리에서 나온 힘이다. 현 정치에서는 정치인들의 자리보전과 흔히 말하는 표심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
결과에 대한 욕구가 본질의 가치를 뛰어넘으면 항상 부작용이 발생한다. 학문의 성취를 위해 공부를 해서 점수를 잘 받는 게 아니라 점수를 받기 위한 공부를 하는 것이, 자신의 모습을 SNS에 올렸더니 호응을 받은 것이 아니라 관심받으려 SNS에 올리기 위한 모습을 꾸며내는 것이, 좋은 컨텐츠를 만들었더니 조회수가 오르는 것이 아니라 조회수만을 위해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어떤 부작용을 만들었는지는 다들 잘 알 것이다. 훌륭한 정치를 통해 표를 얻는 것이 아닌 표를 위한 정치 또한 당연히 부작용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 부작용이 화합, 사랑, 존중, 배려와 같은 미덕의 상실이라 생각한다. 가령 다수의 욕구와 사회적 윤리, 지속가능성 문제가 부딪혔을 때 과연 우리나라 정치에서는 표를 잃을 각오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단순히 표를 잃을 두려움을 회피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의도적으로 표를 만들어내기 위해, 여야 할 것 없이 남녀, 세대, 소득, 직업 등 다양한 집단들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야기했다. 비록 세상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을 없다고 해도 사회적 담론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에 의해 집단 간 손익을 따지며 비교하고 경쟁하는 담론만이 지속적으로 형성된 결과 우리 사회는 개인의 이익이 미덕보다 앞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졌다. 우선순위에 밀렸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이러한 미덕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가식적이다, 다 가면이다, 철없고 현실적이지 못한 이야기다, 꼰대다 등의 부정적인 반응과 함께 '솔직히'로 시작하는 자기합리화를 듣게 된다.
이는 흔히 이기적이라 하는 MZ 세대를 저격하는 말이 아니다. 이 문제를 야기한 정치권은 평균 나이가 50대 중반이고, 이권 다툼에 사회적으로 가장 큰 목소리와 힘을 가진 것도 40대 이상의 어른들이다. 그리고 과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미덕을 잘 전수했을까? 한때 실화라고 떠돌았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엄마, 우리 반에 왕따 당하는 애가 있어. 어떻게 해야 해?"
"그래? 안 됐긴 한데 그 애랑 가까이하지 말렴. 우리 귀한 애는 그러면 안 돼."
다음날 질문했던 아이는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유시민 작가는 항소이유서에서 독재 정권에 대해 '대학을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마비되어 제 한 몸 잘 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집단 양성소로 전락'시킨다며 비판했다. 이 글이 쓰인지도, 독재 정권이 사라진지도 30년도 더 지났다. 아이들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자랐는지를 떠나서, 과연 우리나라의 입시 교육과 가정 교육은 '제 한 몸 잘 사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전문기능인의 양성'보다 미덕을 가르치는 것에 더 중시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정치만이 원인이라 하기엔 뭔가 논거가 부족하다. 다른 나라들도 정치 싸움은 일어나지만 우리나라만큼 극단적으로 분열과 갈등이 악화되진 않았다. SNS가 원인이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SNS 또한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사회 현상을 분석할 땐 역사가 가장 좋은 오답노트이자 참고서라고 생각한다. 분열과 갈등의 역사라고 하면 비윤리적인 행태와 복수가 무분별하게 일어났던 춘추전국시대가 가장 먼저 생각난다.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수많은 사상가들은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이는 공자, 맹자, 노자를 포함한 제자백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 사상가들과 제자들이 왕과 신하, 백성들을 꾸준히 꾸짖고 설득하면서 유교의 기반인 인의예지 사상이 중국에 자리 잡게 되었다.
유교를 포함한 대부분의 종교들은 구체적인 교리에는 차이가 있어도 기본적으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미덕을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종교가 또 하나의 원인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극심한 저출산 문제를 가지고 있는 동아시아 나라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가 무교 비율이 높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시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까 해서 각 나라의 무교 비율과 합계출산율 데이터를 결합해서 확인해 본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무교 비율이 낮다고 해서 무조건 합계출산율이 높다고는 볼 순 없다. 그러나 무교 비율이 높으면 합계출산율이 높을 수 없다. 특히 무교 비율이 20% 이상일 경우, 딱 한 나라(몽골)을 제외하고는 모두 2 이하로 인구수 유지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나는 이 원인을 철학적 양심이라고 생각한다. 심리학자 노렌자얀의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10달러를 주고 익명으로 외부인에게 얼마나 주는지 관찰했다. 이때 종교적인 단어를 계속해서 암시적으로 보여준 실험 군은 평균 4.22달러로 대조군 1.84달러보다 약 2.3배를 더 많이 줬다. 겉으로는 지루하게 생각해도 종교를 통해 지속적으로 미덕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어떤 고민이나 선택을 할 때 미덕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혹은 현실적이나 기타 이유로 미덕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했다 해도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게 만드는 철학적 양심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절반 이상이 종교가 없다. 철학적 양심도, 철학적 양심을 사회적 담론으로 끌어올릴 힘도 부족하다. 정리하자면, 정치에서는 분열과 갈등을 통한 경쟁과 비교를 조장했고, 철학적 양심이 부재한 사회가 이를 거부감 없이 너무나 쉽게 받아들인 결과가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라 생각한다.
과거부터 우리나라의 철학적 양심을 만들었던 건 유교 사상이다. 물론 그렇다고 유교의 모든 것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가부장제를 비롯한 성차별적 문제가 있는 부분도 많고 지나치게 허례허식을 강요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는 변하셨지만 변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 실제로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고추 떨어진다'라는 말을 하셨을 정도로 굉장히 유교적이었다. 지금은 아버지가 때론 어머니보다도 부엌일을 많이 하시고, 명절에 대해서도 어디에 먼저 가든 상관없고 인사는 전 주나 다음 주에 하고 명절 연휴에 여행 가도 상관없다고 하실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나는 신기했을 정도로 예전에 엄청 유교적인 분이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히 책임감이 강하시고, 상호 간 존중을 중요시하시며, 과욕을 경계하신다. 유교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인의예지 같은 기본적인 미덕까지 꼰대와 악습이라는 이름으로 처단당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종교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냐고 한다면 그렇진 않다. 나는 여전히 이과생의 입장에서 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사이비 종교의 문제나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이나 탄압 등의 문제도 알고 있다. 다만 역사적으로 철학적 양심을 만드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던 수단이 종교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해결책이 꼭 종교일 필요는 없다. 나는 종교는 없지만 철학적 양심이라 부를 토대를 책을 통한 다양한 계층의 경험으로 길렀다. 무언가 있기만 하면 된다. 종교던 사상이던 문학이던 미디어던, 우리 사회에 철학적 양심을 길러줄 무언가가, 지금의 대한민국에는 절실히 필요하다.
이번 글은 최근에 쓴 글 중에 가장 어려웠고 고민도 길었다. 우선 정치와 종교라는 잘못하면 큰일 날 수 있는 가장 큰 두 개념을 건드려야 했다. 제1세계 문제나 엘리트주의에 빠진 건 아닌지 스스로 검증도 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시작에서 가장 먼저 물어봤어야 할, '저출산은 과연 문제인가?'라는 질문에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분열, 갈등, 경쟁, 비교는 분명 잘못된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들이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저출산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긴 한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저출산에 대해, 국가 발전의 입장에서는 해결해야 하지만 철학적인 옳고 그름의 관점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겠다. 번식은 생물학적 본능일 뿐이고 닭을 보면 개체 수 증가가 곧 행복인가에 대해서는 미지수일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는 가족이라는 가치에서, 가족 구성원에 대한 사랑, 존중, 배려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가족의 확장(결혼, 출산) 또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여러모로 어려운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