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성수 도서관에서 열린 공백님의 <휴식의 말들> 북토크를 다녀왔다. 읽은 책의 작가님과 대화를 나눠본다는 게 처음이라 기대되기도 했고, 혹시 내가 모르는 북토크만의 문화를 어겨서 민폐가 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있던 분이 '이거 드실래요?' 라고 하시면서 박하사탕을 주셨다.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일 확률이 높다는 편견에 데이터를 하나 쌓는 사이 북토크가 시작했다. 다른 북토크들도 이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훨씬 interactive (정확히 이 느낌을 주는 한국어를 못 찾겠다.) 했다. 초반에 작가님이 강연처럼 이야기를 해주시는 부분도 있었지만, 이후에 있었던 대화 시간에 참가자들과 작가님이 서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걸 보니 사실상 독서모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래서인지 발표 자료에 담기에는 어려웠을 내밀한 이야기들도 나눌 수 있었고, 특히 다른 독자분들이 같은 책을 읽으면서 했던 고민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게 가장 매력적이었다.
열등감이라는 잡초가 마음에 자라나면 일상은 쑥대밭이 된다. 특히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쉬는 시간이다. 자기 비하로 굴절된 시선 안에서는 나의 모든 휴식이 도태를 예비하거나 증명하는 시간으로 변모한다. 예컨대 '저 사람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는 놀고 있네, 이렇게 놀고 있으니까 뒤처지지, 사람들이 나를 찾지 않으니 이렇게 놀고 있구나' 하는 식이다.
공백, <휴식의 말들>
물론 정말 바빠서 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는 부분은 쉴 수 있음에도 이러다 뒤처지지는 않는지 하는 불안감이나 죄책감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도 대학생 때까지는 이게 심했다. 게임을 하면서도 미뤄둔 과제나 시험이 생각나서 스트레스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 쌓여만 갔다. 특히 과제는 미리 끝낼 수라도 있지 시험공부라는 건 시험이 끝날 때까지 완결이라는 게 없었다. 어떻게 해야 나는 놀 때는 놀고 할 때는 하면서 편하게 지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반대로 생각하기'를 해보기로 했었다.
반대로 생각하기란 간단히 말하면 인과관계를 뒤집는 것으로, 여러 분야에 쉽게 적용할 수 있다. 올해 초부터 재테크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포트폴리오 이론을 알게 되면서 재테크가 재밌어져서 내 투자 데이터도 기록하고 이것저것 연구도 많이 해보는 중이다. 재테크에 관련된 책이나 영상을 보면 소비 습관을 개선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한다. 수익률을 1% 올리는 것보다 지출을 1% 줄이는 게 훨씬 쉽고, 특히 나처럼 아직 시드머니가 작은 초기 단계에는 이 효과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투자는 열심히 해도 절약은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아무리 재테크를 열심히 해도 사고 싶은 걸 다 사면 말짱 도루묵 아니냐.'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에 반대로 생각하기를 적용하면 이렇게 된다. "재테크를 열심히 했기 때문에 사고 싶은 걸 살 수 있는 겁니다."
일에 대해서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건 대부분 사람들이 가진 로망일 것이다. 요즘 소설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가끔씩 전업 작가로 전향할 생각이 있냐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이 질문에 아직은 전혀 생각이 없다고 대답한다. 전업 작가가 되면 아무래도 수입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정말 쓰고 싶었던 내용이 아닌, 인기 많은 내용, 잘 팔리는 내용, 혹은 어그로를 잘 끄는 내용에 대한 유혹이 다가올 텐데 아직은 이를 완벽하게 외면할 자신이 없다. 게다가 위에서도 썼듯이 사고 싶은 건 사야 되는 사람이라, 글을 쓴다는 것에만 만족하면서 검소하게 살아갈 자신도 없다. 그래서 나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여기서 벌어다 주는 삶의 안정이 내 창작 활동을 온전하게 보호해 준다고 생각한다. 일하느라 하고 싶은 걸 못 하는 게 아니라, 일을 하기 때문에 하고 싶은 걸 그 자체로 온전하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출근할 맛이 난다.
휴식도 마찬가지다. 지금 쉬기 때문에 뒤처지고 도태되는 게 아니라, 지금 쉬기 때문에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을 하지만 정작 나는 잘 쉬는 편은 아니다. 최근에는 퇴근하고 저녁 먹으면서 조금 쉬다가 두세 시간 자고, 일어나서 두세 시간 작업한 다음 다시 두세 시간 자는, 하루에 잠을 두 번 나눠서 자는 신기한 패턴으로 살기도 했다. 새벽에 작업이 잘 되는 타입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일하고 와서 바로 또 작업하긴 싫어서 한번 해봤는데 생각보다 효율이 좋았다. 제대로 쉬지 못하면 신체적인 신호가 즉각적으로 오는 편인데, 먼저 돌발성 난청이 도져서 왼쪽 귀가 잘 안 들리기 시작하고, 그래도 안 쉬면 구각염이 터진다. 그래서 최근에 구각염이 터졌다. 다만 나는 쉴 수 있는데 제대로 못 쉬는 사람은 아니고, 계속 일을 만들면서 스스로를 쉬지 못하게 만드는 타입이다.
내 손으로 하나하나 쌓아 올린 세계는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하여 나의 버팀목이 되어 준다는 진리 또한 배웠잖아.
얼마 전에는 평소와 똑같이 일을 하고 집에 와서 식구들이 오기 전에 소파에 앉아 산등성이 너머로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리더라.
"계속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다."
노지양 X 홍한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나는 시험공부를 벼락치기로 안 한 적이 없었다. 타고난 게으름도 있겠지만 벼락치기를 계속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렇게 해도 성과가 났기 때문이다. 몇 번 성공하고 나니 계속 나를 믿고 뒤로 뒤로 미루면서 벼락치기를 하게 됐다. 요즘 보면 휴식도 벼락 휴식을 하는 것 같다. 하고 싶은 게 많기도 하고 타이밍이 중요한 기회가 다가올 때도 있고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몰아붙여질 때도 있지만, 계속 바쁜 삶을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오히려 잘 쉴 수 있다는 걸 인지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거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느껴지는 게 나는 신체보다 생각의 단단함이 훨씬 큰 사람이다. '반대로 생각하기'처럼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을 잘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스스로 쉬려고 다짐하면 충분히 푹 쉴 수 있는 사람이다. 7월에도 며칠 동안 마음 편히 쉬는 기간을 정했었고 이번 추석 연휴도 편히 쉬는 기간으로 정했는데, 정말로 완전히 푹 잘 쉬고 왔다. 그러고 나니 다음에도 몰아붙이다가 적당히 신호가 오면 벼락 휴식해서 쉬면 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물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년 건강검진은 열심히 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삶이 재밌고 만족스럽다. 결국 이게 가장 중요한 게 아닐까. 이 정도면 계속 이렇게 살아봐도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