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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Oct 25. 2024

인연

수필산책로 (4)

인연 


  계사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답게 2013년 1월 1일의 밴쿠버는 찬란한 햇살이 누리를 비추었다. 마치 지나간 날의 어둠을 밀어내려는 듯이. 새해 아침이면 나는 항상 명함 철을 정리한다.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 사람의 명함은 가차없이 휴지통으로, 대판 싸우고 난 후 다시 보지 않으리라 결심한 사람의 명함도 추풍낙엽처럼 휴지통 속으로 떨어진다. 그러다 언젠가 다시 만나야 할 사람처럼 생각되면 슬그머니 휴지통에서 집어 올리게 된다. 지난 날의 악연은 잊어버리고 새해에는 새롭게 좋은 인연을 맺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여서이다. 뜻하지 않았던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도움을 준 사람의 명함은 흐뭇한 추억과 함께 명함 철 맨 앞장에 정리된다. 겉장 제목은 ‘고마운 인연들’로 부쳐진다.

  

  한국을 떠난 지 꽤 오래여서 맺은 인연도 수월찮게 사라졌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공통관심사가 없어지니 전화하는 것도 시들해 지고, 서로 각종 경조사에 몸 부조도 못하니 그러려니 하면서도 섭섭한 마음에 소식 줄이 가늘어지다가 마침내 끊겨 버린다. 제일 오래 연락하고 있는 지인은 중학동창생인 시인 정호승과 성악가 전호철이다. 초등학교(대구국민학교) 시절 친구들은 서울 살이 할 때부터 연락이 닫지 않았고, 고등학교와 대학 친구들은 제법 만났었으나 다들 IMF이후 백수가 되고 난 후 약속한 듯이 서로 연락들을 끊었다. 아무래도 한솥밥을 먹던 직장동료 및 선후배간이 제일 활발하게 만났지만 내가 밴쿠버로 온 후 하나 둘씩 연락이 뜸하더니 더 이상 교류를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수십 년을 한결 같은 인연도 있다. 서울 사는 J은행 직장선배 L씨가 그 예이다. 군 제대 후 처음 부임지에서 담당대리를 하던 분이었다. 군사문화의 영향 탓인지 직장상사들은 당시 상당히 권위적이고 고답적이었는데 그는 형처럼 푸근하고 아량 있었다. 잘못된 업무처리를 두고 절대 다른 동료들 앞에서 꾸짖지 않고 둘만 있을 때 조용한 목소리로 시정해 주었다.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있을 때는 일과 후 직장 주변 통닭집에 가서 생맥주를 사주면서 기분을 풀어주었다. 인연이 되려고 그러는지 다음 부임지인 본점조사부에서도 함께 근무했다. 딸 둘을 가졌었는데 갓 결혼한 내게 다년간 연구 끝에 터득한 아들 낳는 비법을 전수해주었지만 셋째도 딸을 가졌다. 덕택에 나는 떡 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지만. 나는 청출어람이라며 웃었다.


  J은행 조사부 근무 중에 D은행이 신설되었고 나는 과감하게 직장을 옮겼다. 마흔을 바라보면서 더 식기 전에 야망을 불태우고 싶었고, 그래서 아까운 인연들을 매정하게 포기했다. 그러나 송별회에서는 눈물을 보였다. 모험정신이 가상하군. 울지 마시오. 이차장(이직 당시 직책). J은행이나 D은행이나 다 같은 은행이니 전근 간다고 생각하시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힘든 길을 택한 용기가 부럽소.


  좋은 인재가 떠난다고 섭섭해 했지만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지 않느냐며 위로해 주던 선배와는 직장을 옮기고 자주 만나지 못했었다. 나는 바로 지점장이 되어 D은행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 승승장구 하던 터이라 옛 직장선배와 한가롭게 마주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는 법. 한없이 날아오를 것 같았던 나는 부실대출 취급과 관련 한직으로 발령받게 되었고, 장래성을 바라보고 주변에 몰려들던 동료나 후배들은 슬그머니 나를 피하곤 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L선배가 전화를 해서 만나자고 했다. 나를 동정할 것이 뻔해서 만나지 않으려고 했더니 일방적으로 ‘목욕이나 하자’고 약속을 정했다. 대중목욕탕에서 함께 벌거벗은 몸으로 대화하면서 그는 말했다. 다시 시작해.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우린 벌거벗은 채 태어났으니 맘대로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지. 직장이란 옷가지에 불과해.


  몇 년 전 미국에서 공부한 딸의 대학원졸업식에 참석차 뉴욕으로 갔다가 나를 보려고 일부러 밴쿠버를 들린 그의 머리는 어느새 백발이 점령하고 있었다. IMF이후 대학 출강한다는 소식 들었는데 밴쿠버에 와서 씩씩하게 잘 산다는 소식 들으니 반갑다며 쌓인 이야기보따리를 우리 집에서 함께 풀었다. 친지가 있는 시애틀을 들릴 예정이라며 환영해 주어서 고맙다는 ‘땡큐카드’를 주길래 무심코 받았다. 가고 난 후 펴 보니 백 달러짜리 지폐가 두 장 들어 있었다.


  그도 IMF직후 구조조정으로 직장에서 나왔었다. 없는 수입에 딸 셋 모두 잘 공부시켜 시집 보내느라 등골이 휘었다. 나보다 더 형편이 어려웠을 터인데 오히려 타국 생활하는 나를 위로하면서 적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유명한 교회 목사의 설교보다 신앙심 깊은 평신도인 그로 인해 나의 예수사랑은 쉬 포기되지 않는다.


  새해아침. 해마다 지만 그와 통화할 생각에 가슴 설렌다. 그의 명함은 예전에 없어졌지만 그와의 좋은 인연은 오랫동안 내 마음속 명함 철에 고이 간직될 것이다. 밴쿠버에서는 이런 인연을 만나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 내게 이런 인연이 되어주기를 기대하기 보다는 내가 누군가에게 이런 인연이 되기를 노력해야겠다. 새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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