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vankorwriter
Oct 25. 2024
플러싱의 추억
타임스퀘어 부근의 42번가 전철역은 사통팔달이다. 뉴욕 맨하튼 동서남북을 관통한다. 28년 전 가을에도 그러했다. 주 5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어김없는 연수가 끝나면 시티은행 연수원이 있는 버넌-잭슨에비뉴 역에서 7번 라인을 타고 맨하튼 행이었다. 밤 11시까지 겁도 없이 돌아다니다 피곤한 몸으로 7번 라인 종점인 메인스트리트 플러싱 역에 도착하면 내 눈두덩이 물먹은 솜이었다.
역에서 세 블록 정도 동쪽으로 걸어가면 한국인 하숙생들이 일부 거주하는 아파트가 보였다. 3개월여의 짧은 체류였지만 마치 가족이 있는 집처럼 푸근했다. 방 두 개 거실 하나. 교포아주머니가 혼자 살면서 하숙생들을 받았다. 방 하나에 4개의 침대가 있었고, 우리는 닭장처럼 생긴 그곳에서도 몸만 뉘면 꿈나라였다.
해외여행이 여의치 않았던 시절. 나는 미국 시티은행 본사에서 주관하는 금융인 중간관리자 과정 연수에 참가하기 위해 1984년 9월 초 김포공항에서 뉴욕 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주 2회, 약 1년간 서울 삼청동소재 금융연수원에서 영어회화를 비롯한 예비교육을 받았다. 장충동 타워호텔에 있는 반공연맹에서 ‘해외체류 시 북한인을 만날 때의 대처 요령’등도 교육받았다. 출국 날에는 부모형제자매 온 가족이 다 공항에 와서 배웅하였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같다. 옆집 드나들 듯 해외여행을 자주 하는 요즘에 비하면.
‘여보. 미국시간 오후 9시 10분(7일 밤)에 뉴욕에 안착했어. 뉴욕사무소 직원이 마중 나와서 차를 타고 하숙집에 도착했어. 플러싱이라는 곳인데 LA의 올림픽타운같이 한인 촌이요. 여긴 한국 같으오. 김삿갓식당에서 저녁으로 게살비빔밥을 먹었어. 진짜 게살이 아니고 오양 맛살 같은 거요. 하숙집 아줌마도 좋고, 빨래는 월 $20주면 아줌마가 다 해주기로 했어. 실감이 전혀 나지 않는구려. 영화 속에서만 보아왔던 뉴욕에 내가 있다는 것이. 매일 소식 전하리다. 일기 쓰듯이. 나중에 좋은 추억거리로 남을 것이요. 내 걱정 하지 말고 두 살 먹은 아들에게 빠이빠이 전해 주구려.’
생전 처음 나가본 외국이 얼마나 신기했는지 나는 매일 그림엽서에 그날에 경험한 일들을 기록하여 서울의 아내에게 보냈다. 혼자만 다른 세상에 온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이다음에 반드시 함께 오겠다는 약속을 해 보면서.
아내에게 보낸 엽서 중 하나에 기록하였듯 하숙집 주변은 온통 한글간판으로 도배되었었다. 여행사, 선물가게, 식품점, 안경점, 식당, 병원 등등. 그래서 연수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면 마음이 더 푸근해졌었다.
하숙집이 있는 5층 아파트는 건물입구에서 각 가구별 고유의 부자번호를 누르면 목소리로 신원확인을 한 후 안에서 문을 열어주는 시스템이 되어 있어 아무나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시스템이라 그것도 신기했었다. 어느 날은 파란 눈의 열 일고여덟쯤 되어 보이는 예쁘장한 서양여자애가 들어가기를 원해서 출입문을 잡아 주었더니 관리인이 기겁을 하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거주자로부터 확인되지 않은 낯선 사람은 절대 출입이 불가능하며 더구나 그 아이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여자라는 것이었다. 본래 금발인데 검은 가발을 쓰고는 메인 역 주변의 한인가게, 거주지 이곳 저곳을 살펴보는 게 그녀의 일과라고 했다.
사연인즉 생모가 사망한 후 어린 나이에 계모를 맞게 되었는데, 계모는 한국인이었으며 그녀보다 서너 살 많은 남자아이와 함께였다고 한다. 검은 머리의 동양인을 의붓오빠로 맞은 그녀는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오빠가 다정하고 자상해서 차츰 정이 들었는데 어느새 오누이의 감정을 넘어서버렸단다. 그 때문에 아버지와 계모는 말다툼을 하다가 이혼하고 오빠는 플러싱의 어느 아파트에 월세 살면서 한인가게에서 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플러싱에 와서 오빠를 찾아 헤맨다고 했다. 정신이 오락가락한다지만 예쁜 미모에 한인청년들을 보면 화사하게 웃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지난 9월 아내와 함께 뉴욕을 여행하면서 특별한 관광지도 아닌 플러싱을 굳이 방문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그런 추억들 때문이었다. 세월이 오래 흘렀는데도 꼭 옛날 풍경은 그대로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예전처럼 타임스퀘어 역에서 7번 라인 전철을 타고 메인스트리트 역으로 향했다. 덜컹거리는 전철 속에서 마음도 덜컹거렸다. 하숙집 아줌마는 여태 살아 있을까? 아파트는 재개발로 헐리지는 않았을까? 얼굴이 익었던 한식당, 잡화점, 선물가게, 여행사 사람들도 예전 그대로일까? 세월이 많이 흘러도 뉴욕 맨하튼은 그리 변하지 않은 듯 하니 플러싱도 그대로겠지. 나는 아내에게 몇 번이나 들려 주었던 플러싱 이야기를 하면서 종점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종점의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매표구도 그대로이고 지저분하고 갑갑한 공기, 회전출입문, 심지어는 길안내표지판도 그대로인 듯 했다. 그러나 역을 나서 거리로 드는 순간 나는 밀려오는 허무와 실망감에 발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고층건물이 많이 들어선 것도 아니었다. 지형이 바뀐 것도 아니었다. 역을 나서면 바로 눈에 들어오던 한글 간판은 모두 중국어로 바뀌어 있었다. 점차 하숙집 아파트로 가면서 온통 거리는 중국글자와 중국말로 넘쳐나고 있었다. 플러싱은 완전 중국인 촌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광역밴쿠버의 리치먼드 시에 온 듯한 착각을 가져 주었다.
“한국사람들은 여기서 네다섯 블록 떨어진 곳에 살아요. 종점 주변 가게 임대료가 올라서 좀 더 싼 곳을 찾아 다른 곳으로 갔어요. 몇 군데 한국사람 주인인 곳이 있지만 중국인들 상대로 장사하니까 간판이 모두 중국어로 되어 있을 거예요.”
지나가는 중국아주머니에게 한인타운이 여기 있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돌아온 답이었다. 경제발전으로 부자가 된 중국인들의 세계진출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고향을 잃은 사람처럼 서글픈 심정으로 하숙집 아파트를 찾았다. 다행히 아파트는 그대로였다. 출입문 부자만 신형으로 바뀌었을 뿐 건물 외형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동양인오빠에 대한 친근감을 표시하기 위해 검은 가발을 금발머리에 쓰고 서성이던 여자아이는 없었다. 한국인 오빠를 만났을까? 아니면 그러다 정신병원에 들어갔을까? 아니면 온전히 정신이 들어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세월은 어디서든 비껴가지 않는 것을.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열심히 연수를 받던 청년이 이제 환갑 넘은 초로가 되어 여기 서 있는데 무엇인들 변하지 않으랴. 추억은 추억으로 간직해야 아름다운 법. 공연히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플러싱을 방문해서 젊은 날의 좋았던 추억만 망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사랑했던 여인과 헤어져 수십 년 만에 만났는데 그 여인은 늙고 뚱뚱하고 수다스러워져 예전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을 보듯 했다. 그러나 소득도 있었다. 아내와 함께 오겠다는 약속도 지켰고 지는 해 저녁노을 바라보며 플러싱 중국인거리를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아내와 손 꼭 잡고 거닐면서 도란도란 함께 나눈 이야기는 내게 새로운 플러싱의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니까. 그리고 이제는 그 추억이 예전의 추억을 밀어내고 있다. 그 추억이 곰삭기 전에 다시 한번 플러싱을 찾아야겠다.
(2013년 2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