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 아들 셋이 스노보드를 타기 시작했는데, 그 대화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 한국에서 결혼 전 함께 스키를 타러 다니던 때를 잠깐 회상하게 되었다. 우리가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단둘이서 무주 리조트로 1박 2일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었는데, 그날 우리가 1박을 했었다는 걸 남편이 아예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둘 다 순진했고, 워낙에 보수적이었던 나였기에 정말 순수하게 잠만 잤던 날이긴 했지만 ㅎㅎ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남편이 함께 여행을 갔었고, 뭘 했었는지는 기억하지만, 숙소를 잡고 1박을 했었다는 것은 전혀 기억을 못하고 있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긴 뭣하지만, 남편의 나에 대한 애정은 늘 한결같다. 좀 유별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아이들이 나를 힘들게 하거나, 싫은 소리라도 하는 날이면, 그날은 애들이 혼나는 날이고, 한 번도 내 외모에 대해서는 농담으로라도 나쁜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남편이 우리의 첫 1박 여행을 기억 못 하다니 무슨 일인가?
30대 초반.. 같은 회사를 다녔던 우리는 겨울이면 부산에서 그나마 가까운 스키장인 무주 리조트에 스키를 타러 다녔다. 당시 남편은 회사의 유일한 미혼 남자였고, 동갑인 나와 내 친구를 제외하고는 다 여자 동생들이었다. 대여섯명이서 스키를 타러 가면 유일한 남자였던 그가 혼자 일꾼 노릇을 자처하곤 했다. 내가 다녔던 무역 회사는 작은 회사지만 사장님의 마인드가 젊고 열려 있어서 (그 당시 40대 초반이셨으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 젊으셨네!) 회식 문화도 술 먹고 노래방 가는 루트가 아닌, 우리가 좋아하는 볼링을 치러 가거나 영화를 보러 가게 하셨다. 직원들끼리 개인적으로 스키를 타러 다니는 걸 아시고는 전 직원이 참여하는 1박 2일 스키여행도 추진해 주셨다.
회사에서 직원들과 스키여행을 갔을 때 그 당시 나를 이성적으로 맘에 두고 있었던 남편은, 내 뒤에서 내가 가는 루트대로 계속 따라다녔었다고 한다. 한참을 재미있게 타다가 내가 가파른 언덕에서 커브를 틀다가 속도 조절을 못하고 잘못 넘어지는 바람에 왼쪽 다리가 바깥으로 꺾어져 인대를 다쳐버렸다.
오도 가도 못하고 아파하고 있는 상황에서, 엑스맨처럼 짜잔~ 하고 나타난 남편이 내 다리를 만져주고 페트롤카를 불러주었다. 나는 페트롤카가 도착할 때까지 눈밭에 누워있었는데, 고글너머 그의 표정을 보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나를 보살펴주는 그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 후로 한 달이나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나를 늘 부축해 주고, 한의원에 데려가주고 성심성의껏 나를 챙겨줬다. 우리가 사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였다랄까.. 사내 연애를 들키기 싫어 결혼 전까지 사장님께는 숨기고 있다가, 둘이 함께 청첩장을 드리면서 제대로 서프라이즈 해드렸던 기억이 난다. ㅎㅎ
여하튼, 내 다리가 낫고 나서의 우리의 첫 여행지는 당연히 무주 스키장이 되었다.
연애를 시작하고 떠나는 둘만의 첫 1박 2일 여행이었다. 무조 리조트에는 스키장 내에 멋진 숙박시설이 있는데, 숙소에 노천 온천이 딸려 있어서 인기가 많았다. 주로 멤버십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멤버가 아닌 경우는 꽤나 숙소 잡기가 힘든 곳이었다.
마침 남편의 후배 중에 여행사에 다니는 동생이 있어서 남편이 특별히 부탁해서 후배가 어렵게 방을 잡아 주었다. 아주 조그마한 방이었는데도 가격이 꽤나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다리를 다친 이후로는 스키 타는 것에 트라우마가 생겨서 원래 잘 타지 못했던 스키는 이제 그만 포기해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스키장으로 여행을 갔지만 스키는 안 타는 여행을 했다. 대신 무주 리조트 내의 곤돌라를 타고 올라가 정상에서 눈 설경을 마음껏 구경하고, 눈 속에 파묻히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리조트 내의 멋진 산책로를 걷고, 커피를 마시고, 밤에는 노천 온천에서 스파를 하며 멋지게 야간 스키 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몸을 녹였다. 연애 초반이었으니 얼마나 설레고 좋았겠는가?
평소 남편의 성격을 너무 잘 알고 있고, 나를 끔찍이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런 여행에서 함께 밤을 보냈다는 걸 잊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남편이 나에게 1박 여행의 이야기를 듣더니 화들짝 놀라며 자신이 그 일을 기억 못 하다니 너무 이상하다고 했다. 후배가 방을 잡아준 것조차 기억을 못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내가 그때 얼마나 긴장했을지.. 상상도 못 할 거야. 이야기만 들어도 그렇네. 심장이 터졌을지 모르는데 들리진 않았지? ㅎㅎ 아마 그래서 그런 걸 거야. 근데, 이야기를 자꾸 들으니 조금씩 기억이 나는 거 같네"
남편은 어릴 때 키우던 개가 맞은편에서 남편에게 달려오다가 차 사고로 죽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다고 한다. 개가 남편을 먼저 구해주려다 그랬다는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너무나도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남편은 그 사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가위로 오려내듯 그 순간만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 같다고. 때로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나 힘들었던 시기를 선택적으로 기억을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너무 행복한 것도 기억을 못 하는 사람들이 있나? ㅎㅎ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때 기억 장치인 해마의 어디를 손상당해서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감정들이 생기면 컨트롤하지 못해서 그냥 지워버리는 걸까? 그것이 궁금하다 ㅎㅎ
남편과 한국에 가게 되면 무주에 다시 놀러 가보고 싶다.
그때처럼 눈밭길을 산책도 하고, 스파도 하면서 추억을 떠올려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