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바이올린이다. 4개의 현을 가지고 있으며, 음역대가 넓어서 다양한 멜로디의 연주가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활과 현이 마찰을 일으키면 브릿지와 몸통으로 전달된 진동으로 소리를 내는 악기다. 연주곡 자체가 클래식하고 우아한 것들이 많다 보니 나를 연주하시는 분들은 주로 부드럽고도 절도 있어 보이는 검은 드레스를 많이 입는 듯하다.
내 친구들 중에는 몸값이 2만 불이나 되는 친구도 있고, 아직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십만 불짜리도 있다고 들었다. 현재 내 가치는 350불 정도는 되려나? 그래도 꽤 유명한 야마하라는 브랜드를 달고 있긴 해서 나름 자부심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완전히 속해 있지는 못하고 이 집저 집을 거쳐가는 렌트 신세이지만, 2022년부터는 어느 열정적인 50대 아줌마의 손에 쥐어졌으니 가게에서 누군가에게 간택되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벽에 걸려있는 친구들에 비하면 행복한 것 아닌가?
나를 빌려간 아줌마는 참 특이하다. 50살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도 흔치 않은 데다, 잘 안 나오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연습도 꾸준히 하고, 생각보다 오랫동안 사투를 벌이며나와의 인연을 이어가는 것 같다. 젊은 사람들이 한 번만 연습하면 되는 걸 10번은 해야 하는 나이이지만, 노력하며 나아가려는 자세가 보기 좋아서 내 주인으로서 썩 맘에 드는 편이다. 나 같은 렌트 바이올린은 주로 초보자들의 손에 쥐어지기 때문에 비브라토나 고급스러운 소리를 내어본 적이 없다. 주로 스즈키 1, 2권으로 낑낑대다가, 스즈키 3권을 떼기 시작하면 바이올린을 그만 포기해야 할까 하는 기로에 서거나, 통곡의 벽인 스즈키 4권으로 나아가기 위해 본인의 바이올린을 업그레이드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는 늘 이 정도 수준의 연주에 만족해야 한다.
이 아줌마도 낑낑거리는 것만 1년 정도 하다가 요즘엔 그나마 미뉴에트 등 들어보면 다 아는 곡들을 연주하기 시작해서인지, 부쩍 나를 찾는 일이 많아진 것 같다.
그 전 주인인 젊은 남자아이는 나를 컴컴한 케이스에 가둬 놓고 겨우 한 달에 몇 번만 빛을 보게 해 주고, 심지어 I hate you! 를 서슴없이 내뱉던 버르장머리 없던 녀석이었다. 이 아줌마는 케이스란 건 밖에 외출할 때나 필요한 것이지, 평소엔늘 나를 꺼내놓고, 거실 소파옆 가장 아늑한곳에 자리 잡게 해 주셨다. 항상 나를 볼 수 있고, 언제든 쉽게 만지고 싶어서라고 하시는데, 어차피 보호 기능, 온도, 습도 유지 기능을 기대할 수 있는 케이스는 악기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아줌마 아들이 던진 공에 맞아 내 브릿지가 부러진 이후로는 안방으로 옮겨져 버려 조금 외로울 때도 있지만..
아줌마가 가끔 내 몸에 향기 나는 뭔가를 발라 닦아 주기도 하고, 먼지가 생기지 않게 헝겊으로 구석구석 광이 나게 해 주시는데그럴 때면 정말 기분이 좋다. 나도 이렇게 사랑받는 존재이구나라고 느끼면서.
요즘은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을 들으시다 보니, 나의 바깥 외출은 더 요원해졌다. 그래도얼마 전에는아줌마 지인들 몇 명이서 바이올린 삼중주를 연습하신다길래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그날 만난친구들은 렌트지기가 아니어서나랑 처지가 다르다. 진짜 주인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케이스도 멋져 보이고 소리도 더 잘 내는 친구들이다.그런 친구들을 만날 때면 살짝 내가 작아지긴 한다. 나에겐 언제쯤 진짜 주인이 생기게 될까?
나를 렌트해 주신 아줌마에게도 나보다 더 좋은 바이올린을 만나게 되기를 바라지만, 또다시 헤어질 생각을 하니 섭섭하긴 하다. 이 50대 아줌마의 목표가 내년에는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들어가는 거라고 하셨는데 아마 그렇게 된다면 나랑 곧 헤어지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앞으로의 아줌마의 행보가 참으로 궁금하지만, 그걸 옆에서 끝까지 지켜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아쉽다.
아줌마를 떠나게 돼도, 지금처럼 좋은 주인을 만나면 좋겠는데 걱정이다. 또 그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처럼 바이올린을 싫어하는 애는 아녔으면 좋겠다.
아줌마는 요즘 바이올리니스트라도 되시려는지 매일 삼십 분에서 한 시간씩 연습을 하시곤 하는데, 나도 나름 좋은 소리를 내주고 싶어서 힘을 불어넣어 주고는 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서 안타깝다.
아주 초보일 때는 활을 긋기만 해도 소리도 엉망이고, 내 몸의 10퍼센트도 제대로 못쓰는 거 같아서 안타까웠는데, 2년이 넘어서는 요즘은 조금씩 곡을 연주하는 재미에 빠지신 거 같다. 활을 긋는 손과 현을 누르는 손가락과 몸의 힘이 그야말로 삼위일체가 되어 아주 좋은 소리가 날 때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가끔 있다. 그러면 이 아줌마는 그 곡에 흠뻑 빠져 몸을 왔다 갔다 추임새를 넣어주며 신나라 하시며 연주한다. 나는 그럴 때면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아줌마 어깨 위에서 신이 나서 고운 소리를 내준다.
아줌마의 체력은 보기보다 약하신지, 몇 곡만 연달아 연주해도 힘이 들어 침대에 털썩 누워 버리신다. 그러면 나도 함께 침대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따라라 띠리~~~ 라라라~~~~ 띠리리~~
아까 연주했던 곡을 흥얼거리면서~
아줌마도 언젠간 멋지게 연주하실 수 있겠지?
60세쯤 되시면 지역 오케스트라 한켠에서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시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