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 싸는 캐나다 엄마
아침 5시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진다. 남편과 아들 셋의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니, 눈만 비비고 부엌으로 내려가는 게 일상이 된 지 10년째다. 남편이 다른 주에서 일하게 될 때는 한식 도시락 싸는 일이 줄어들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침마다 도시락을 싼다.
도시락 재료가 떨어져 있으면 난감하다. 특별한 메뉴가 없을 때는 아이들 도시락에는 햄과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가 기본이다. 여기에 주스팩 하나 넣고, 치즈나 크래커, 야채, 과일 몇 가지를 더하면 완성. 가끔은 파스타를 넉넉히 만들어 보온 용기에 담아주거나, 중국 마트에서 사 온 작은 새우 덤플링으로 간단한 만둣국을 만들어 넣어주기도 한다. 미니 김밥이나 스프링롤을 준비하기도 하고, 스팸 잘라 굴소스 한 스푼 넣어 계란 볶음밥을 만들어도 좋다. Naan으로 미니 피자를 구워주기도 하는데 아이들이 아주 좋아한다. 그날그날 상황에 따라 준비를 하고, 요즘은 반조리 냉동식품들 중에도 활용할만한 제품들이 많아서 여러 가지를 시도해보고 있다. 막내는 친구들이 컵라면을 가져오는 걸 보고 자기도 싸달라고 조르지만, 아직은 한 번도 넣어준 적은 없다. 정말 바쁜 날이 오면 그때는 넣어주게 될까?
내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는 급식이 없었기에, 아침마다 어머니들이 도시락을 싸느라 분주했다. 밥과 반찬 두세 가지가 기본이었고, 인기 반찬은 동그랑땡, 소시지, 감자볶음, 쥐포무침등이었다. 솜씨 좋은 엄마를 둔 친구들은 장조림이나 잡채 같은 특별한 반찬을 가져왔고, 그런 날이면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같이 나눠 먹곤 했다.
형제가 5명이나 되는 내 친구는, 어머니께서 진주햄에서 나온 방망이만한 커다란 분홍 소시지를 계란에 부쳐서 5개의 도시락통에 급식 배급하듯 똑같이 개수를 맞춰서 넣어 주신다는 말에 엄청 웃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것 중 또 하나는 밥 위에 계란지단을 노란 이불처럼 덮어주고 케첩을 뿌려주는 것이었다. 계란말이를 싸가면 친구들이 하나씩 다 집어 먹어버리니까, 자기 자식이 온전히 다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을까?
늘 집에서 먹던 반찬에 특별할 것이 없었던 내 도시락은 인기가 없었다. 한 번은 도시락을 여는데, 시커먼 고사리 나물이 잔뜩 들어있어 얼른 반찬통을 닫아버린 기억이 난다. 그땐, 엄마가 조금 원망스러웠는데, 내가 도시락을 직접 싸보니 그 수고로움을 알 것 같다. 요즘 한국은 급식 덕분에 엄마들이 한결 수월해졌겠지만, 우리는 캐나다에서 여전히 도시락을 싼다.
캐나다에서는 워낙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이 함께 생활하다 보니, 급식 시스템이 자리 잡기 어렵다. 게다가 알레르기 문제가 많아 학교에서 일일이 맞춰주는 것이 불가능하다. 대신, 일주일에 한 번 미리 주문할 수 있는 Special Lunch가 있는데 그날만큼은 엄마들도 아침 도시락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날 아침은 커피도 더 여유롭고 맛있다.
처음 캐나다, 그것도 서스캐처원 리자이나에 이민을 왔을 때는 도시락 싸는 일이 쉽지 않았다. 냄새날 수 있는 한식은 엄두도 못 내고, 주로 샌드위치를 싸줬다. 로메인 상추, 오이, 토마토, 베이컨, 햄, 치즈를 넣거나, 감자 샐러드, 계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반 잘라서 이쁜 단면이 나오게 해서 도시락 통에 넣어 보냈다. 빵 종류도 다양하게 바꿔가며 싸주었다. 김밥을 싸간 날은 필리핀 아이들이 치킨 하나랑 김밥 한 알을 바꿔먹자고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한 번은 큰 아이가 자기 샌드위치가 반 친구들 사이에서 'Jackson's special sandwich'라고 불린다고 했다. 대부분의 캐나다 아이들은 샌드위치에 상추하나, 햄 한 장, 치즈 한 장만 넣거나, 잼이나 누텔라만 바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신경 써서 만든 도시락이 특별해 보였던 모양이다.
10년 동안 도시락을 싸다 보니, 이제는 조금 더 실용적인 방식으로 변했다. 사과의 갈변을 막기 위해 설탕물에 담그던 정성도 어느 순간 사라지고, 샌드위치 속 재료도 점점 간소화되었다. '친구들 도시락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면서도, 사실은 나의 편리함을 위한 선택이다.
오늘은 불고기 크로와상 샌드위치를 만들어 줬다. 학교 다녀온 세 녀석이 "오늘 점심 너~~~ 무 맛있었어요!"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너~~ 무"가 길면 길수록 맛있었다는 뜻이니까. ㅎㅎ
그게 뭐라고, 그러면 그날은 아주 보람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