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때하나 없이 깨끗하고 윤기가 나는 세면대과 욕조, 호텔식으로 접혀 바구니에 층층이 담긴 타월들, 어느 것 하나 넘치는 것 없이 최소한의 것만 갖춘 모던한 샤워용품들.. 바닥은 뽀송하고 향기도 나는 것 같다.
여행을 가서 호텔에 묵을 때면 화장실이 멋진 곳을 만나면 일단 합격이다.
나도 마음은 호텔 화장실을 꿈꾸지만, 현실은 남자들 넷이 있는 집이라는 것. 특히나 남자 애들만 쓰는 화장실은 깨끗하게 유지하기도 힘이 든다.그래도 손님이 오는 날이면 제일 먼저 신경 쓰이는 게 화장실이어서, 화장실부터 먼저 청소하고, 몇 번이나 들락날락거리며 확인해 본다. 좋은 향기가 나도록 디퓨져도 올려두고 신경을 쓰는 편이다.
라떼는 말이야~ 가 절로 나오는 어릴 때의 70년대 화장실을 생각하면 지금의 화장실이 얼마나 좋아지고 편해져서 감사한 일인지.. 태어나자마자 수세식부터 경험한 어린 친구들은 또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를 일이다.
내가 유치원을 졸업하던 그날..(계산해 보니 1978년. 나 옛날 사람 맞음)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빨간 구두를 신고 졸업 기념사진을 찍던 순간이 아직도 너무나 생생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뒤에 일어난 엄청난 일때문에 절대 그날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실내에 화장실 있는 집이 거의 없었다. 대부분 마당에 화장실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나중엔 수세식으로 된 화장실도 많이 생겼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푸세식이 대부분이었다. 어릴 때는 밤에 촛불을 들고 밖에 있는 으스스한 화장실에 가는 것만큼 무서운 일은 없었다. 화장실 문은 왜 늘 삐걱거리고, 밑은 왜 이다지도 아득하고 깊어 보이는지... 밑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아무리 휴지로 코를 틀어막어도 비집고 들어올 만큼 진하고 강렬했다.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 하는 그 유명한 귀신 이야기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하다. 누군가 머리 위 꼭대기에서 날 쳐다보는 거 같아 모골이 송연해진다. 무서움을 잊으려고 노래를 부르며 주문을 외운다. 급하게 볼 일을 마치면, 나죽어라 하고 냅다 달려 집으로 뛰어 들어가곤 했다. 어린 나에겐 참으로 감내하기 힘들었던 으슬으슬한 화장실의 기억이다.
내가 다녔던 유치원은 교회에서 운영하던 곳이었는데, 예배당 밖 마당에 있던 화장실 역시 푸세식이었다. 그날.. 졸업식을 다 마치고 난 후, 화장실에 갔다가 잠깐 중심을 잃고 그만 다리 한 짝이 화장실에 빠져버렸다. 다행히 엄마가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나의 비명소리를 듣고, 곧바로 나를 구출해 주셨다.
검은색 면 스타킹이 시커먼 똥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는 엄마에게 안겨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울었는데 몸에서 심하게 나는 그 변 냄새 때문이라기보다 내가 아끼던 빨간 구두가 엉망이 돼버렸기 때문이었다.
똥으로 칠갑된 어여쁜 나의 구두여~~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팬티스타킹을 벗기고 나를 씻겨주던 엄마의 당황스러운 모습도 떠오른다. 그 후 내 빨간 구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통탄의 눈물을 흘리며졸업식의정수를 제대로 보여주며 유치원의 마지막을 장식했었다는 건 선연하다.
캠핑장을 가더라도, 너무 자연의 느낌이 나는 화장실이 있는 곳은 그래서 피하게 된다. 나의 무의식에 잠재된 기억 때문일까? 푸세식 화장실 극복이 아직도 참 어렵다.
이제는 화장실이 뭔가 냄새나고 더러운 곳이 아닌, 그저 방과 비슷한 한 공간처럼 느껴지게 할 정도로 우리를 편하게 해 준다. 너무 편해서인지, 한번 들어갔다 하면 너무 오래 안 나오는 녀석들이 생겨서 문제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