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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Jul 15. 2023

St.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生』

그녀가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건 그녀가 살아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生』,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2015), 257면




Street


로자 아줌마는 오랫동안 '엉덩이로 벌어먹'고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자기처럼 성매매를 하는 여성들이 낳은 아이들을 길러주었다. 그들에게 아이가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아이를 뺏기기 때문이다.


그녀가 늙고 병들면서 그녀의 정신과 육체는 흉측하게 망가진다. 그런 그녀를 돕는 사람은 양탄자 장수 할아버지, 마찬가지로 매춘을 하는 트랜스젠더, 청소부이자 불을 삼키는 묘기로 벌어먹고 사는 아저씨이다. 그리고 항상 로자 아줌마 곁에서 그녀를 지키는, 네 살을 단숨에 먹은 모모이다. 그들이 서로를 돕는 방식, 계산을 하지 않는 방식은 아름답다. 모모가 도움을 청했을 때 어느 때건 달려오는 행위는 눈물겹다. 로자 아줌마에게서 돈이 떨어지자 이웃들은 음식을, 돈을, 의사를, 뭐든지 가져왔다.


생이 로자 아줌마를 파괴하고 그 무게에 모모가 짓밟히는 동안 그들을 '보호'한 것은 프랑스가 아니었다. 그들의 가족도 민족도 아니었다. 경찰이나 복지 공무원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나 기타 어떤 것으로 규정되는 사회가 아니었다. 소외된 거리의 소외된 生, 그러나 거기에 분명히 자 아줌마와 모모가 살았다. 미성년자 금지인 장소에서 미성년자 금지의 행위를 하는, 때로는 너무 선정적이고 때로는 너무 끔찍해서 모모를 뺀 다른 아이들은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그런 거리에서.




State


번역가는 왜 삶이 아니라 생으로 번역했을까? '삶'이라는 단어에는 동사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나는 살고, 너도 살고, 모모도 산다. 반면 생은 한자이기 때문에 명사의 느낌이 강하다. 그것은 나와 떨어져 마치 제3의 객관적인 객체로 존재하는 듯이 느껴진다. 심지어 나와 대척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생각했다.

에밀 아자르, 같은 책, 152면


그러나 이것은 모모의 입장이다. 세상의 눈에서 모모와 그 애를 둘러싼 생은 세상을 등지고 있다. 세상이 반대하는 형태와 모습으로 살아있다. 성매매를 하고, 아이를 불법으로 맡아 기르고, 신분을 위조하고, 트랜스젠더로 살고, 물건을 훔치고,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들의 생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어왔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들을 모른 체 할 수가 없다. 내 앞에 모모가, 내 앞에 짓밟힌 生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生이 있듯이.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 엉덩이는 가장 성스러운 것이며 절대 엉덩이로 벌어먹고 살아선 안된다고 말할 만큼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매춘을 하고, 매춘부를 돕고, 뚜쟁이와 알고 지낸다. 훔친 옷을 입고 거지 꼴을 한 모모는 금발의 빛나는 또래를 보고 도망친다. 그들의 '반사회적 행위'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빅토르 위고의 '불쌍한 사람들(레 미제라블)'은 모모의 오랜 친구들이다. 그들에겐 그들을 보호하는 사회가 없는데 이를 '반사회적 행위'라고 칭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그들의 사회에서 불법적 행위는 곧 사회적 행위이며, 적어도 그들은 훔친 물건으로 부자가 되진 않았다. 아무리 훔쳐도 부자가 될 수 없었으므로.




Saint


못생기고 냄새나는 로자 아줌마는 모모에게 '삶'의 아름다움,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해 가르친다. 흔히들 '삶'의 아름다움을 대변한다는 젊음이, 건강이, 부대끼는 이웃이, 어느 정도의 돈과 여유가 모두 사라졌을 때에도 삶은 여전히 아름다운가? 늙고 병들고 사람들이 떠나 심신이 고통받는 때에도 생은 아름다울 수 있는가?


지금 생각하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에밀 아자르, 같은 책, 279면


생은, 완전히 끝나버린 뒤에도 아름답다. 모모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 모모가 그의 이름을 불러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에밀 아자르, 같은 책, 178면 변형). 모모로 인해 나는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 층에서 지저분하게 죽어가는 할머니를 걱정하게 다. 걱정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이다. 생에 악취와 똥오줌이 묻어도 모모가 사랑하는 한, 그 구역질 나는 생은 아름답다. 시간이 흘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생은 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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