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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화 Feb 04. 2024

긴-긴-밤-

루리, 「긴긴밤」

이 책은 내가 읽으려다기보다는 선물용으로 샀다. 아는 분의 딸이 다음 달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얼마나 설레는 또는 두려운 3월 2일일까? 인터넷 서점 한줄평에서도 책에 극찬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그중 자녀들을 읽어주려고 샀다가 부모님도 울면서 읽었다는 후기도 있었다. 이번에 읽지 않으면 영영 보지 않을 것 같아 보내기 전에 살짝 들추었다.




이 글의 서술자는 어린 펭귄이다. 그런데 풀어내는 방식이 독특하다. 자신의 세 아빠 중 한 명인 노든의 유년시절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노든이 얼마나 훌륭한 코끼리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훌륭한 코뿔소가 되었는지. 노든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야 '나'가 등장한다. 노든과 '나'는 바다로 가는 여정을 같이한다. '나'는 바다에 가서 다른 펭귄을 만나 훌륭한 펭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루리, 「긴긴밤」, 문학동네(2021), 16면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루리, 같은 책, 115-116면


코끼리들 틈에서 노든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다. 코뿔소 무리에서 그는 훌륭한 코뿔소가 되었다. 우리의 정체성은, 내면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이웃을 통해 빚어진다. 노든의 삶을 통해 우리는 펭귄의 삶을 예견할 수 있다. 펭귄은 훌륭한 펭귄이 될 것이다. 다른 존재를 아주 훌륭한 존재로 성장시키는 연결고리는 이어질 것이다.


코뿔소와 펭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먹는 음식부터 사는 장소까지 공통점을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그런 그들이 뿔과 부리로 교감한다. 나와 다른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기댄다. 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본다.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눈을 떨구고 있던 노든이 대답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루리, 같은 책, 94면




어느 날 펭귄은 자신이 이름이 없다고 한다. 다른 인물들, 치쿠와 윔보와 노든은 모두 이름이 있다. 독자들도 이름을 궁금해할 법 한데 노든은 이렇게 답한다.


"날 믿어. 이름을 가져서 좋을 거 하나도 없어. 나도 이름이 없었을 때가 훨씬 행복했어."
루리, 같은 책, 99면


이 부분에서 작가가 아주 영리하게 이야기를 짰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들의 세계에서 이름은 인간이 지어준 것이다. 이름이 생겼을 때 그들은 우리에 갇혔다. 그들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이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이름들은 때로는 그를 흔든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얽매이는 때를 생각해보라. 노든의 정체성은 그가 선택한 '코끼리'이자 '코뿔소'였지, 원치 않게 얻은 이름 '노든'이 아니었다. 그는 펭귄에게 정체성이 주어진 삶이 아니라 되고자 하는 삶에서 비롯됨을 가르쳐주었다.


작가는 펭귄의 이름을 삭제하여, 읽는 이들… 특히 어린이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펭귄에 이입할 수 있도록 했다. 어느 환경의 어느 어린이건, 성장하는 동안 수없이 많은 긴긴밤을 보내게 된다. 그는 때로는 코끼리를 꿈꾸고, 그다음에는 코뿔소나 펭귄이 되고 싶을 수도 있다. 그도 펭귄처럼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거나 원하는 꿈을 이룬 순간에 혼자일 수 있다. 그러나 기나긴 밤들은 지나간다. 그가 악몽을 꾸는 밤도, 슬픔에 사무치는 밤도, 꿈을 이루지 못해 좌절하는 밤도 지나간다. 날이 밝아 목적지를 향해 걷는 중에 가족을 얻고, 가족과 헤어진 다음 날에는 친구를 얻고, 친구를 잃은 후에는 또 다른 동반자를 얻는다. 혼자인 날도 있겠지만 낮과 밤이 흐르듯이 그런 날 그대로 멈추지는 않는다.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루리, 같은 책, 57면


우리가 긴 코를 가졌는지 뿔이나 부리를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나를 타인과 다른 존재로 만들지만, 우리는 여전히 함께이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다. 이는 나를 특별하고 작고 외롭게 한다. 때로는 나와 같은 뿔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사는 기쁨을 누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영원히 혼자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괜찮다. 삶은 고여있지 않다. 삶은 흐른다. 노든의 삶처럼 나의 삶도, 당신의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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