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다음 날, 개인적인 일정 때문에 시청 앞 서울 도서관을 찾았다. 근래에 이사를 하면서 생활권도 많이 바뀌었다. 걸어서 3분도 채 걸리지 않던 도서관에서 원하는 책을 대부분 빌리며 편하게 살다가 이젠 지하철을 타고 시청역까지 가 서울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다. 사실 근처에 도서관이 있긴 한데, 읽고 싶거나 읽어야 할 책이 으레 없어서 시청 앞까지 가야만 했다. 지금까지 알아보기로 그나마 가까우면서 원하는 책이 있는 도서관이 그곳이다.
시청 앞, 덕수궁과 광화문 근처. 이런 곳들은 도저히 눈 뜨고 보기가 힘들어서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집회에 나갈 때나 주로 개인적인 일로 스트레스 받아서 하염없이 걷고 싶을 때 찾던 곳이었다. 가끔 아스팔트 위해 앉아서 구호를 외치고, 종종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열을 식히던 곳. 그곳에 방문하는 나의 목적이 달라져서 인지, 압도적 의석수의 차이로 야당이 여당을 이겨서인지 이태원 참사 시민 분향소가 새삼스레 눈에 띄었다. 나는 종종 혹은 가끔 찾던 그곳에 그들은 계속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아프게 박혔다.
49제 때였던가, 이태원에시민 분향소가 생겼다고 해서 찾았던 기억이 난다. 하필 이재명 대표가 방문한 시간이라 기자들에 추모객에 정신없이 휩쓸려 제단 앞으로 갔고 비로소 희생자들의 얼굴을 처음 보았던 때, 젊디 젊은 그들의 모습에 잠깐 넋을 놓았다.49제 집회도 참석했는데, 희생자 이름을 한 명씩 부르다 보니 눈물이 절로 났다.그러고 보면 그날의 아스팔트는 꽁꽁 얼어냉기가 내 발가락까지 전해졌었다.
참사를 감추던 이들이 참패했으나, 목표하던 200석을 달성하지 못했음을 확인한 22대 총선 다음날. 그들이 선 곳의 온도가 궁금해졌다. 어쨌든 함께 하고 있다는 뜻을 전하고 싶었다. 보라색 리본을 하나 챙겨서 도서관에 으레 들고다니던 백팩에 달았다. 사실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은 떳떳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바람의 세월
10주기를 맞아 세월호 참사 유족이 직접 찍은 영상으로 만든 다큐 영화 <바람의 세월>이 상영 중이다. 나는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을 통해서 이 다큐에 대한 정보를 처음 접했다. 감독을 맡은 문종택 님은 시종일관 굳은 얼굴이었다. 다큐 이야기가 끝나고 다른 영화 이야기를 할 때에도, 모두가 낄낄 웃을 때에도 그는 웃지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에 한마디 더 하게 해달라 요청을 하더니 세월호 생존자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 말했다. 그들의 죄책감과 사회가 그들에게 씌운 프레임에 대한 이야기였다. 분노와 안타까움이 일었다. 동시에 세월호가 참 오래된 일처럼 느껴져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졌다. 잊지 않겠다던 다짐이 생활에 밀려 멀어져 버린 것만 같았다. 그래서 곧바로 영화를 예매했다.
금요일 저녁 시간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극장에 앉아 있는데, 일행이 있는 이들이 2014년의 기억들을 끄집어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가 시작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리는 훌쩍임으로 바뀌었다.
이태원 참사 당시 애도에 대한 이야기를 참 많이 했다. 어디서 들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애도의 기간을 끝내고 건강하게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다큐 속 가족들이 시종일관 묻는 질문 또한 '이유'였다. 이유가 궁금했을 뿐인데 그들은 투쟁해야 했다. 그러나 답을 듣지 못했고, 끊임없이 배신 당했고, 밀려나 고립되었다. 심지어 비난도 받았다. "더이상 뒤통수 맞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하던 한 유족의 울분은 그 모든 시간의 결과일 것이다.
가장 놀랐던 장면은 유가족들이 세월호 수습 작업을 감시하기 위해 진도의 산 위에 돔 형태의 텐트를 치는 당면이었다. 사실 그렇게까지 하고 있는지는 몰랐다. 국가의 일처리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고, 더이상 아무도 믿지 못하겠으니 직접 눈으로 감시하고 확인해야 했을 것이다.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어 가슴이 아팠다. 그런 생각하면 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후 많은 것이 나아졌음에도 "방치되었다"라고 말하는 그들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 외롭고 고통스러웠던 만큼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에 미치지 못했겠지. 무엇보다 여전히 우리는 세월호가 침몰한 이유를 모르지 않는가. 더이상 무엇을 밝혀낼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어렵다.
애도의 기간을 투쟁으로 보낸 이들은 이제 일상을 돌아올 수 없다. 그 죽음이 그들의 삶에 달라 붙어, 마음과 몸이 병의 이어져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역사가 그들에게 지은 씻을 수 없는 죄다.
제주 4.3사건과 세월호
다음날 노무현 시민센터를 찾았다. '서울 4.3영화제'라는 행사가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정지영 감독님의 토크 시간이 궁금했는데, 그 전에 <너와 나>라는 영화가 상영된다고 해서 이어서 볼까 생각했다. 노무현 시민센터는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이나 기회가 없다는 핑계로 가지 못했다. 사실 그냥 가면 될 곳인데 게을러서 가지 못한 것이다.
<너와 나> 스틸컷
영화 <너와 나>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첫 장면, 박혜수 배우의 장면에서 이 영화에 대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언뜻 났다. '소재가 4.3이랬나?' 4.3영화제라 4.3사건 관련된 것들만 상영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 떄문에 그렇게 생각했다.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어가며 영화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니 중후반쯤 알아챌 수 있었다. 아, 이거 세월호 영화구나. 살짝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프로그램이 적힌 종이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덕분에 영화의 정체를 찾아나가며 어리둥절한 감정이 절반 인상인 채로 봐야만 했다. 그러나 영화의 모든 것이 세월호 단원고 학생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니, 영화 자체가 참 신선하고 만듦새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다신 없을 그들의 일상,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가장 뜨겁고 가장 빛나는 시간을 보낸 하루, 수학여행 전날. 그 극적 순간을 그릴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현실과 꿈과 어떤 다른 순간(?)인 듯한 시간대를 교차하는 이야기 방식도 좋았다. 어쩌면 희생된 이들이 어딘가를 떠돌며 이런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죽어가는 순간 그들에게 떠오른 마지막 장면 같은 것일까. 다양한 상상을 하게 하는 영화라는 점이 더욱 흥미로웠던 것 같다.
이어지는 정지영 감독의 토크에서는 제주 4.3 사건과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지영 감독님의 차기작 <내 이름은>이 4.3영화다. '제주 4.3 영화시나리오공모전' 당선작인데 사실 같은 해 공모에 나도 냈었다. 극영화 부문 단 한 편을 뽑는 공모전이라 큰 기대 없었지만, 당선작의 제목을 보고 나니 무슨 내용인가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당선자에 낯선 영화사의 이름이 쓰여 있던 것 때문이기도 하다. 기사로 로그라인 정도를 접할 수 있었는데, 꽤 신선하면서도 의미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패배를 인정한 것 같기도ㅎ) 정지영 감독이 그 영화를 연출하신다니 기대감이 증폭된다.
대담 중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다. 제주 4.3 사건의 유족분들이 직접 참석하셔서 그들의 입장을 들을 수 있었던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4.3사건은 절대 다수를 이루는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들도 있지만, 무장대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입장도 존재한다. 폭력 속에 가족을 잃은 이들의 슬픔을 수치화 할 수 없기에 양쪽다 존중 받아 마땅하고, 그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 가장 큰 숙제일 것이다.
90년대 학번이라는 어떤 분이 이런 말씀도 하셨다.
"우리나라가 2020년대 시기가 되면 아스팔트 위해서 시위하는 일은 없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제주 4.3영화제에서 세월호에 관한 영화를 틀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해방기에서 6.25 전쟁 시기까지 이어지는 제주 4.3사건을 시작으로 국가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사건이 계속 되고 있다. 문제는 그 후속에 관한 것도 똑같다는 것이다. 유족들의 입을 막고, 고립시키고,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방식. 투쟁을 통해서 진실을 쟁취하게 하는 그런 방식.
세상이 변하지 않있기 때문에 그날 나도 아스팔트 위로 갔다. '세월호 기억 문화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도착하기 오픈 마이크가 마무리되고 본식의 식순으로 이어가는 중이었던 것 같다. 시청 앞 이태원 참사 시민 분향소 옆 길에서부터 꽤 긴 길이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나는 사이드에 서서 구경하듯이 있었는데, 행사에 나오신 자원봉사자분께서 노란 한지로 만든 나비를 나 어깨에 붙여주셨다. 그러고보니 주면 사람들 모두 하나씩 나비를 붙이고 있었다.
묘하게 마음이 따뜻해졌다. 여전히 아스팔트 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지만, 직접 겪은 일이 아님에도, 10년이나 지났음에도 기꺼이 아스팔트 위로 나오는 사람들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