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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소 Oct 14. 2022

화북댁 이야기 #1

꽃할머니 이야기

2022.06.11 ~ 



마장댁에서 화북댁이 된 날, 

아침 일찍 제주에서 유명한 도장집에서 도장을 팠다. 전세권 설정을 위한 계약서에 도장을 쾅하고 찍었다. 전세권 설정에 기분 나빠하시던 주인집 할머니의 마음도 풀어드릴겸, 산뜻하게 시작하고 싶어서 이사 떡을 드렸다. 부동산에 들어오실 땐, 어딘가 불편하다는 표정였지만, 다행히 기분 좋게 웃으며 나가셨다. 시작이 좋았다. 


새로 이사 온 화북댁은 제주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주공 아파트다. 세대 수가 800세대가 넘는다. 주변에 초등학교도 두 곳이나 있고, 물가도 관광지에 비해 상당히 싼 편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좋은 점들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던 점은, 오래된 나무들 덕분에 단지 내부의 길들이 숲 같다는 것. 아침에 일어날 땐 알람을 대신해주는 새소리들. 그리고 베란다에서 바로 보이는 놀이터도 좋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부터 태권도복을 입은 초등생들까지 한데 섞여서 까르르 꺅 하면서 논다. 넘어질까 멀지 않은 곳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아빠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런닝바람의 할아버지와, 며칠째 같은 갈옷을 입으신 할머니. 그 웃음 소리와 살아있는 풍경들 덕분에 나도 같이 생기가 돈다. 


제일 좋은 점은 각 동마다 꽃할머니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네가 있는 놀이터 바로 앞 1층에 사시는 할머니는 화원을 만들어놓으셨다. 이 화원은 단지 내 길고양이들의 놀이터다. 할머니의 몸 여러군데에는 빨갛게 부어오른 스크래치들이 있는데, 고양이들을 중성화하려다가 고양이들이 할퀸 자국들이라셨다. 밥을 먹으러 오는 고양이, 할머니 집의 베란다에서 잠을 청하려 오는 고양이... 모두 이름을 불러주시며 반겨주신다. 



화원에 관심을 가지자 할머니는.. 이건 치자꽃, 이건 낮달맞이꽃, 이건 봉숭아꽃... 이름 모를 야생화까지 소개해주셨다. 비어있는 분홍색 세제 통에 심겨진 꽃들은 얼마나 귀여운지. 아니, 그 꽃들보다 화분으로 쓰려고 분홍색 세제통을 가위로 차근차근 자르셨을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참 사랑스럽다. 


다채로운 소리들과 형형색색의 꽃들, 푸르른 나무들로 채워진 이 화북댁에서의 일상. 


언제까지 살지는 모르겠지만, 마장댁만큼 사랑하게 되겠지. 잘 기록해두고 잘 기억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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