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고삐를 당겨라
톡! 맥주 한 캔을 딴다. 시간은 오후 4시 5분. 딱히 술꾼도 아닌 내가 술을 마시기에 적당한 시간은 아니지만 맥주 한 잔이 당긴다. 캬 하고 시원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가슴이 답답하니 어떤 행위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바로 내 딸 때문이다. 혹은 딸의 장애 때문이고 혹은 깜냥도 되지 않는데 장애아의 엄마로 택함 받은 내 자신 때문이다. 딸이 어쨌길래 그러냐고? 둘째 사자와 식탁에 앉아서 간식을 먹고 있다. 지금은.
그 직전에는 손발을 씻지 않으려고 또 그 직전에는 학교 갔다 온 옷을 벗지 않으려고 온몸을 오징어로 만들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프런트 포치에 앉아서 간식 먹으려고 하는 걸 못 하게 해서인 걸로 추측된다.
오늘따라 공사 차량이 많아 영 내키지 않는데도 꽃이 고집을 부렸다. 간식은 식탁에서 먹는다는 규칙을 내세워봐도 통하지 않아서 반강제로 데리고 들어 왔다.
이런 경우 아이가 알아듣도록 설명하고 마음을 바꿀 때까지 기다리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꽃의 울음소리가 커지고 바닥에 눕다시피 하다 보면 나의 스트레스가 올라가고 더 험한 상황이 야기될 수 있으니 강제력을 발동하는 것이 이득이다.
다섯 살 꽃은 바지 신발 양말을 “조금” 벗을 수 있다. 윗도리는 “조금 더 조금” 벗을 수 있으며 신고 입는 건 “그보다 훨씬 조금 더 조금” 가능하다.
오늘은 드라이브 웨이에 앉아서 양말 한 짝 신발 한 짝을 벗더니 그 이상은 힘든지 짜증을 내며 나보고 해달라고 했다.
아이들이 아무 데나 내키는 곳에서 뭔가를 하려 하고 해야 할 일을 하기 싫다고 떼쓰는 건 (그렇게까지) 크게 괴로운 일은 아니다. 물론 다섯 살보다는 두세 살에 어울리는 행동이란 걸 알고 있지만 이래 봬도 장애아의 엄마 오 년 차가 그 정도 일로 술을 마셔야겠다고 결심하진 않는다.
아무런 해결책을 주진 않을지언정 아주 약간의 해소를 위해서라도 술을 마셔야 했던 건 꽃을 학교에서 픽업하면서 시작되었다.
학교에서 나를 보면 꽃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며 선생님들한테 자기 엄마라고 자랑하고 책가방을 가지러 간다. 이번 주는 웬일인지 앞에 행위를 다 하고도 책가방을 챙기지도 않았고 계속 더 놀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게 가장 심한 날이었다.
보조 교사는 자기도 할 일이 있었기에 지나가는 5학년 여자 아이한테 꽃을 유도해 보라고 부탁했으나 그마저 통하지 않았다. 담임은 다른 아이들 사인 아웃하면서 꽃의 안전을 위해 계속 지켜봐야 했고 코비드 시국이라 내가 들어가서 데리고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마침 우리와 가끔 플레이 데이트를 하는 아빠가 옆에 있어서 꽃을 부르며 집에 가자고 했지만 꽃은 그 말도 듣지 않았다. 적당히 끝내야 할 선을 넘어선 것이다.
담담한 척하면서도 내 속은 타들어 갔다. 보통의 다섯 살 아이는 결코 이 정도로 하지 않는다. 조금 더 있다 간다고 하는 경우는 있지만 길어도 1분이 되지 않는다. 더구나 옆에 아이들이 다 떠나는 걸 보면 자기도 가겠다고 나선다. 그것이 보통의 다섯 살이다.
내 딸은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부터 알았는데도 이런 상황이 되면 무너지는 가슴을 꼭 붙들고 있어야 한다.
꽃은 보통이 아닌데도 보통의 아이들 속에 살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다른 아이들은 세 돌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하는 것들을 백번 천 번 겪으면서 깨닫고 몸과 마음이 자라야 한다.
해야 할 행동이 있고 하지 않는 게 나은 행동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야 하고 자기의 감정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내 예상보다 더 시간이 걸리는 듯하다.
공립학교 프리 스쿨에 장애아로 등록되어 꽃의 장애는 아주 공식적인데도 여전히 다른 사람 보기에 민망하다. 장애 자체가 부끄럽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알파벳을 제대로 익히지 못하는 걸 말하는 것도 아니다.
프리 스쿨에 다니는 나이인 사 오세 때에는 아직 어른들의 지시를 곧잘 따르기 마련이고 자기가 속한 집단에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개개인의 개성은 있으나 행동 면에서는 어느 정도 모양이 맞춰지는 시기인 것이다.
그중에 내 딸만 튀어나온 돌인 것이 슬프고 또한 미안했다. 많이 좋아졌다 많이 좋아졌다 남들이 말하고 내가 보기에도 그렇지만 튀어나온 생김새 자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남다른 염색체, 그로 인한 인지 및 감정 조절 능력 부족. 꽃의 잘못도 아니고 내가 안 가르친 탓도 아닌데도 슬프고 미안했다. 누군가는 그런 꽃을 한번 더 쳐다보거나 혹은 다운증후군이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할 것도 마음 아팠다.
미국 공립학교는 제도적으로 모든 종류의 장애아를 받아야 하고 IEP(Individualized Education Plan)라고 불리는 특수 교육을 제공한다.
꽃의 반에도 다른 특수 아동이 있다고는 하지만 “다운증후군 같이” 중증 장애면서 특수반보다는 일반 교실이 더 적합한 진단을 가진 아동은 없다.
말이 조금 느리다던가 소근육이 조금 뒤처지는 아이는 있어도 꽃만큼 외모도 언어도 소근육도 대근육도 행동까지 튀는 아이는 꽃밖에 없다.
물론 그 행동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밝고 더 박수를 많이 치고 더 기뻐하는 것도 포함하지만 지금처럼 완고한 모습이 더 눈에 띄기 쉬울 것이다.
그 속에서도 꿋꿋한 내 딸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면서도 씁쓸한 맛을 지우기 어려운 건 장애아의 엄마로서 내 자질 탓이리라.(장애아 엄마의 자질이란 게 있다면)
꽃은 결국 담임 손을 잡고 나왔다. 그나마 마무리는 웃으면서 자기는 장난이었다는 듯 담임한테 Bye 라며 인사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하교 길 반 정도 스쿠터를 탔다. 가다가 나를 돌아보며 “엄마 (빨리 와!)”라고 소리쳤고 지나가는 스쿨버스를 보며 스쿨버스라고 비슷하게 말했다.
꽃이 스쿠터를 탈 때는 생각보다 빨라서 숨찰 정도로 뛰어야 따라잡을 수 있다. 욕심으론 집까지 타고 갔으면 싶지만 꽃은 웨건에 앉아서 간식을 먹어야겠단다.
그렇게 내가 웨건을 밀고 있는데 뒤에서 이웃 아이들이 다가왔다. 같은 학교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다.
부모들은 저 뒤에 오고 둘이서만 두 발 자전거를 탄다. 씽씽 달리다가도 건널목이 되면 알아서 멈춰 서고 둘이 뭐라 뭐라 대화를 주고받는다. 솔직히 부럽다.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부등호로 따지면 하교 길 내내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신체력과 안전 수칙을 지키는 인지력이 더 부럽다. 거기서 나아가 한참 떨어져 있다가도 부르면 오라는 데로 오는 아이를 가진 부모가 부럽다.
길을 건널 때 멈췄다 차가 오는지 확인하라고 해도 꽃은 멈추지 않는다. 무조건 들어서고 본다. 그래서 난 늘 손 닿는 거리에 있기 위해 애써야 하고 내가 이리 가자 저리 가자고 해도 꽃이 내키지 않은 이상 듣지 않는다.
이미 그 모든 것이 가능한 보통 아이들과 꽃이 얼마만큼이나 친구라는 게 될 수 있을지 꽃의 미래를 생각하면 깜깜하다.
감사라. 나도 감사가 뭔지 안다. 감사란 힘든 중에도 감사할 거리를 찾는 것이고 궁극의 감사는 조건 없이 감사하는 일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런 감사에 가깝지조차 않다.
이렇게 가까이 좋은 공립학교가 있어서 꽃이 장애아로서 최대한의 교육을 받을 수 있고 다운증후군임에도 신체적 제약이 없는 편인 것이 감사한 건 맞다.
하지만 진짜 내 주제는 내 딸에게 이런 염색체를 쥐어준 인생이 원망스럽다. 왜 내 딸이어야 했는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라 왜 염색체 이상이어야 했는지. 죽을 때까지 물어도 답이 없는 그 질문이 고통스럽게 심장에 파고든다.
그래서 의미 없더라도 꼭 맥주 한 잔을 마셔야만 했다. 멈추지 않고 부정적으로 내달리는 내 생각의 고삐를 당겨야 딸을 부둥켜 앉고 또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