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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과사자 Nov 04. 2021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이 있다

콜로라도 Jackson Guard Station

우리는 왜 세 살 다섯 살을 데리고 캠핑을 떠났나


10월 16일은 올해 마지막 캠핑을 가는 날이었다. 5월 16일부터 시작한 여행이 공교롭게도 5개월 후 같은 16일에 끝나게 되었다.


그동안 한 달에 두 번 꼴로 캠핑 짐을 싸면서 걱정도 되고 설레기도 하고 왜 굳이 어린애들 데리고 이러고 있나 의문이 들기도 했다.


여행을 시작한 표면적 이유는 코비드로 인해 한국에 가기가 부담스러우니 사람들 대면할 확률이 낮은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마음 한 구석에 뚫린 구멍을 채우고자 하는 처절한 심정도 있었다.


첫째가 다운증후군으로 태어난 후 평범한 둘째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상황과 여러 가지 감정을 겪었다. (늘 그렇듯) 사람이 한 말에 얽힌 일은 상황 자체보다 더 힘들었다.


그러다 작년에 나 자신이 참 초라하다 느끼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있었다. 못난 나에게 화가 나서 꽃과 사자에게 화를 전가하기도 하고 슬프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 우울감을 이기려고 혼자서 아이 둘을 데리고 매일같이 나갔다.


화장실을 사용해야 할 상황이 오면 큰 일 나는 줄 알던 때라 집 주변 20분 거리 사방으로 하이킹을 다녔다.


둘째는 제대로 걷기도 전부터 하이킹 트레일에서 웨건을 밀고 다녔다. 흙과 바람과 햇살 속에 서너 시간씩 두 아이를 쫓아다니면서 감정이 어느 정도 정화되었다.


2016년부터 살아온 우리 동네 근방에 아름다운 곳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올해 봄 꽃과 사자와 함께 로키 산을 오르면서 조금 더 먼 곳으로 여행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한 말에 상처 받고 괴로워하기보다는 내 아이들과 시간을 알차게 보내는 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다운증후군 딸이 있어도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행을 할 수 있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내가 “다운증후군이 있어도”라고 말하는 데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일단 꽃은 다섯 살인데도 대소변 훈련이 되지 않았다. 공용 화장실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로드 트립을 하면서 두 아이 똥기저귀를 갈아야 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사자는 하루에 서너 번 대변을 본다.)


신생아 때부터 대변을 보면 물티슈로만 닦은 적이 없는 우리는 여행 중에도 그 룰을 지켰다. 처음엔 생수통으로 씻기다가 나중엔 짜는 소스통을 사용하여 물까지 아끼게 되자 우리끼리 굿 아이디어라며 감탄을 마지않았다.


그리고 꽃은 다운증후군으로 인해 보통의 다섯 살보다 tantrum이 심하다.


이리 가자 하면 노! 저리 가자 하면 노! 그래서 안아 주려고 해도 노! 기저귀 갈자 하면 노! 밥 먹자 해도 노! (그러고는 먹는다.) 뭔가 차분히 설명을 해줘도 아직은 본인의 기분이 먼저이다.


차에 오래 앉아 있었으니 좀 걸으라 해도 어디 앉으려고 고집을 피운다. 한숨이 나서 내버려 둔 사이 쓰레기통을 발견하고는 냅다 뛰어가서 구경한답시고 (키가 작으니) 입을 갖다 대는 아이와 먼 여행길에 나서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의 여행이 계속될 수 있었던 건 꽃이 튼튼한 덕분이다. 몇 시간씩 차를 타는 것도 오케이! 불편한 잠자리도 오케이! 대충 사 먹여도 오케이! 날씨가 덥다 추웠다 변덕스러워도 오케이!


내가 아는 첫째는 타고난 여행자이다. 2kg으로 태어나 이주 동안 니큐에 누워있을 때는 다운증후군 딸 돌보느라 여행도 못 가고 치료만 받는 삶을 사는 건 아닐까 아득했던 게 사실이다.


퇴원 후에도 우리가 미처 몰랐던 병이 발견되는 건 아닐지 조마조마해서 모든 것이 괜찮아 보인다는 소아과 의사 말을 의심했고 심지어는 아이가 돌연사하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꽃은 나한테 대체 뭔 소리?라고 하듯이 크게 아픈 곳 없이 자랐다. 비행은 물론이고 한 번에 몇 백 킬로씩 로드 트립을 하고 배를 타도 꽃은 끄떡없었다.


작고 약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식으로 강한   꽃이 있어서 우리는 올해 텐트를 싣고 콜로라도 곳곳을 탐험할  있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이 있다


우리의 캠핑 여행 피날레는 텐트가 아닌 캐빈으로 장식했다.


콜로라도에 언컴파그레이라는 지역이 있는데 그곳에  삼림 초소로 쓰던 한 캐빈을 일반인에게 렌트한다고 한다. 이름하여 잭슨 가드 스테이션.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언컴파그레이. 집에서 450km 떨어진 외딴 캐빈. 성수기의 캠핑장처럼 바로 옆에 누군가가 없다는 점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관리실에 전화해서 비밀번호를 받으면서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디다 연락하냐고 물었다. 자기들은 주 5일 여는데 우리 캠핑은 토 일. 어차피 전화도 터지지 않는 곳이라 의미도 없었다.


장작도 넉넉히 있고 다 괜찮을 거라고 하는 관리인과 전화를 끊고 차를 타고 가면서도 기대와 함께 약간의 두려움이 가시질 않았다.


여섯 시간 정도 달리다가 큰 도로에서 벗어나 비포장길로 들어섰다. 내비게이션을 보니 그 길만 40분 이상 가야 한단다.


자던 아이들이 깨서 bumpy bumpy 외치며 깔깔대더니 경치를 보면서도 와! 하고 감탄했다.


9월 말까지 단풍이 절정인 곳이라 이미 대부분 낙엽이 졌고 지난 주말부터 주중까지 몹시 추웠던 날씨에 눈도 제법 쌓여 있었다.


이곳엔 애스펜 나무가 빽빽했다. 아직 남아 있는 노란 잎과 이미 옷을 벗은 나무의 하얀 가지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었다.


띄엄띄엄 농가며 캠핑장이 있고 몇 분에 한 번씩은 차가 지나갔다. 길이 그래서인지 픽업트럭이 80프로 이상이었다.


Dispersed camping이라고 불리는 노지 캠핑객도 몇 보였다. 눈 속에서도 의연하게 캠핑 준비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살얼음이 낀 강을 따라가다 보니 길에서 100걸음 들어간 곳에 우리 목적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기우와 달리 포근한 느낌이 드는 캐빈이었다.


하루에 스무 대 정도 지나가는 트럭 말고는 아무도 없는 빨간 캐빈. 마지막 농가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 나무와 산과 강 말고 아무것도 없는 그곳.


“There’s really nothing here.”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다.


아이들은 스노 빕을 입고 눈밭에서 하루 종일 놀았다. 나무 꼬챙이로 상상 낚시를 하고 작은 언덕에 기어올라가 엉덩이 썰매를 탔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호박을 굴리고 던지고 펌킨 패치가 따로 없었다.


멀쩡한 길을 두고 나무 울타리를 끙끙거리며 넘나들었고 푹신한 나뭇잎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뭐라 뭐라고 했다.


나중엔 장작 보관하는 헛간에서 썰매를 발견해서 질퍽한 눈 바닥도 좋다고 서로 태워주다가 우리가 팬 장작을 실어 캐빈으로 옮겨 가기도 했다.



캐빈 자체가 아이들에겐 신기했다. 몇 번이고 캐빈 뒤편으로 가더니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가리키며 저것 보라고 우리를 불러댔고 캐빈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만져보고 다녔다.


장작을 태워야 하는 난로, 바닥을 쓰는 빗자루, 쓰레받기, 낡아서 삐걱이는 침대며 램프마저 아이들에게는 장난감이 되었다.


저녁이 되어 우리가 준비한 불과 그곳에 구비된 램프를 켜도 어스름했다. 아이들은 스모어를 계속 외쳐댔고 우리는 난로에 굽다가 너무 화력이 센 바람에 까맣게 타버린 마시멜로를 보고 웃었다.


캠핑용 스토브가 있었지만 캐빈에 있는 가스레인지에 요리를 했다. 한식을 주로 먹던 평소와 달리 햄버거를 해봤는데 최소한 Wendy’s 버거보다는 훨씬 낫다며 맛있게 먹었다.


여기서 한 시간만 가면 블랙 캐년 국립공원이 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이름 있는 그곳에 가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캐빈을 벗어나 비포장 길로 내려가기만 해도 장엄한 풍경이 펼쳐졌다. 길 양 옆으로 쭉 늘어선 애스펜 나무 숲. 멋진 바위 꼭대기를 따라 내려앉은 눈. 눈 사이로 흐르는 강물.


그걸 보고 와서 캐빈 생활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2박 3일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집이었으면 바로 씻었을 아이들 스노 빕은 벽에 걸어 말렸다가 놀 때마다 입고 또 입었다.


다음 사람을 위해 캐빈을 청소하고 장작을 채워놓고 그곳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은 11시간이 걸렸다. 원래 타려고 했던 도로가 막혀서 먼 길로 돌아와야 한 데다 아이들을 위해 놀이터에 들릴 때마다 한 시간은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To go 했던 식당 두 군데 다 맛있었고 놀이터엔 가을 풍경이 가득했기에 짜증스럽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이 있는 잭슨 가드 스테이션. 애스펜 나뭇잎이 노랗게 반짝이는 9월의 어느 날 아이들과 함께 다시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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