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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과사자 Mar 11. 2022

꽃과 사진

Pre-k Picture Day

오늘은 딸이 학교에서 사진을 찍는 픽처 데이였다. 미리 뭘 준비한 건 아니지만 있는 옷 중에 가장 단정한 드레스를 입히고 머리도 살짝 말아 주었다. 그런 준비 과정 속에 늘 도망 다니는 꽃이 드레스를 입은 본인이 프린세스라며 몇 번이고 말하는 걸 들으니 피식 웃음이 난다.


세 살 때 사립 프리 스쿨에서 시작해서 공립학교를 다닌 지 어언 햇수로 4년 째건만 내 머릿속에 막연하게 떠오르는 학교의 이미지는 아직도 차가운 잿빛이다. 꽃이 태어나서 2주 동안 니큐에 있을 때 집 앞 학교를 오가는 아이들을 보며 당연한 줄 알았던 그 학교 생활을 내 아이는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줄줄 흐르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대한 메디컬 이슈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운증후군이라는 이름에 압도되어서 한동안 아이가 당장 어떻게 될 것만 같은 압박감에 시달렸는데 꽃은 멀쩡하게 자라 작년부터는 그전에 큰 관심 없던 프린세스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성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자라길 바라는 내가 굳이 소녀스러운 옷이나 장난감을 사주지 않아도 주변 누군가로부터 공주에 관련된 책이나 가방을 접하던 꽃이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드는 의상을 입거나 액세서리를 하면 프린세스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사자마저 그럴 때 누나를 프린세스라고 불러준다. (덧붙여 왕자에는 관심 없는 사자 자신도 공주스러운 걸 좋아하여 핑크빛 소품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상황도 종종 생긴다.)


오늘처럼 꽃의 외모에 조금 더 신경 쓰게 되는 날 내게 찾아오는 난관은 바로 머리 손질이다. 나도 부드러운 직모 남편은 나보다 더 부드러운 직모. 내 어릴 적 사진을 보면 머리숱이 워낙 적어서 세 살 즈음에도 남아인이 여아인지 구분이 어려운 지경이었기에 꽃 또한 신생아 시절에는 날 닮아 그러겠거니 했는데 아직도 크게 풍성해지지는 않았다. 머리를 한번 묶고 꽂는데도 핀이 흘러내리기 일쑤이다.


내가 거기에 너무 집착하면 꽃이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몇 번 고치다 말았는데 과연 그 핀이 사진 찍는 시간까지 머물러줄지 걱정이 앞선다.


꽃의 담임은 자율성과 독립성을 중요시한다. 예를 들어 손을 씻을 때 꽃이 물을 다 털기도 전에 소매를 내려서 소매가 젖어도 그걸 꽃 스스로 깨달아야지 대신해주지 않는 스타일인 것이다.


머리가 흘러내린다고 해서 한국 어린이집처럼 다시 묶어주는 일도 없는데 픽처 데이라고 핀을 교정해줄지 잘 모르겠다. 꽃이 도와달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꽃은 핀이 흘러내리면 그대로 잡아 뽑을지언정 그게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의문이다.


결국 꽃의 사진에 왕핀이 예쁘게 나오길 간절히 바라는 이는 나뿐이니 나만 욕심을 내려놓으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만약의 아쉬움에 대비해 미리 집에서 담아 놓으면 되는 일이다.


꽃에게 오늘 픽처 니까 가서 스마일 하면 된다고 알려주고 카메라를 들이대니 정말 로봇 같이 웃는 표정을 짓는다. 그게 아니고 자연스럽게 하라고 지적하니 이번엔 찍지 말라고 이리저리 달아나는 . 그럼 프린세스처럼 책을 보라니 그제야 포즈를 취해준다. 이렇다  정면샷이 없으면 어떠하리. 그야말로 꽃처럼 예쁘다.


딸 이름을 지을 때 바로 이거야! 하고 확신했던 이유 중 하나가 꽃이라는 뜻 때문이었다. 꽃의 본명은 어떤 언어에서는 하나님의 은혜, 어떤 언어에서는 행복, 또 다른 언어에서는 꽃이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가끔은 생각해본다. 스텔스기처럼 소리 소문 없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나의 딸.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이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해서 미리 걸러내는 선택을 할 순 없다며 기형아 검사를 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건 내 아이가 건강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두려웠던 기형이란 손가락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수술하고 한 때 마음고생하면 없어지는 정도”의 장애였던 것 같다. 그런 내게 하늘이 두쪽 나도 변하지 않는 염색체 이상을 가진 딸이 찾아와 이것도 은혜인지 물어본다. 영구적인 지적 장애를 가지고도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같이 알아가자고 한다.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한 정답은 알지 못한다. 안 그래도 힘든 세상에 느려도 괜찮다 장애가 있어도 괜찮다고 확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부모로서 씁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꽃과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은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딸은 늘 해피하다고 말하고 행복 지수가 높지 않은 나 같은 사람도 딸을 통해 행복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납작한 코, 찢어진 눈, 딱 봐도 다운증후군인지 아는 얼굴. 어떤 이는 꽃을 보며 은연하게 비장애인 자기 아이를 자랑스러워하는 분위기를 내뿜었던 나의 딸. 하지만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내 눈에 내 딸은 꽃처럼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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