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보수는 여러 개념을 포함한다.
이는 정치, 경제, 자유, 사회 등에 대해 어디에 주로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아주 단순하게 보수, 중도, 진보라고 한다면 디자인은 어디에 속할까. 개인성향은 차치하더라도 직업적 관점의 디자인은 어떤 속성이 있을까.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한다. 어떤 사상이든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위험하다. 보통은 상황이나 위치에 따라 여러 개념이 조금씩은 혼재되어 있다. 우리가 16가지의 MBTI 성향으로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평가하는 것이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경계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고유한 한 보통의 인간은 여러 가지 사상과 관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 주와 부가 비중에 따라 다를 뿐이다.
디자인은 진보일까 보수일까, 아니면 그냥 중도일까.
단순하게 보면 중도가 가장 합리적으로 보인다. 상황에 따라 가장 유리한 쪽을 그때그때 판단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쁘게 보면 기회주의다. 별다른 주관 없이 빠른 판단이면 족하기 때문이다. 유시민 작가가 이런 상황을 두고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본능을 비유한 것은 탁월한 비유라고 본다.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을 위해 사용한 전략으로 생명체의 가장 근본적인 본능이기 때문이다. 디자인 역시 마찬가지다. 시류와 상황에 맞게 디자인의 모습과 태도를 바꿔가면서 강자의 편에 서 있으면 적어도 생존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자기만의 고유한 정체성이나 이후 확실한 자리매김은 요원한 일이라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니체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은 자유를 말했다.
이 자유는 기존에 만들어진 질서나 형식 등에 얽매이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 사고하고 고뇌하지 않으면 타인이 만들어놓은 질서나 형식 속에서 살아간다. 스스로 노예가 되는 길이다. 노예의 길은 편하고 달콤하다. 기존 질서를 타파하고,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이 선행되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 그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이다.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단련하고 발전해야 한다. 자유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틀을 깨어나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에게 주어진 빨간 약과 파란 약의 선택에서 진실을 보기 위한 그 판단이 진실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형식이나 기존 질서에 순응하는 태도에서는 발전이 없다. 세상 모든 것은 디자인의 대상이다. 기존 생성된 디자인 결과물은 모두 개선의 여지가 있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 모든 개념, 사상, 질서, 물건 등은 디자인의 대상이다. 노예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기존 질서에 순응할 뿐이다. 또는 수동적으로 직무에 임할 뿐, 스스로의 관점이나 노력으로는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할 수 없다. 가끔 보수주의자 디자이너, 중도주의자 디자이너를 접한다. 이들이 할 수 있는 디자인의 한계는 기존 결과물의 개선 정도다. 중도라고 하는 기회주의자들은 어찌 보면 시류에 맞게 잘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스스로 돌아볼 때 디자이너라는 이름이 버거워 보이지 않은가.
자유인이 되자.
디자인계의 기성세대들은 루키들에 비해 경험, 명성, 직위가 있다. 이들은 더욱더 자유로울 수 있다. 지금까지 생성해 온 커리어는 얼마든지 기존 질서와 형식에 항거해도 용인될 수 있는 부분이 크다. 쇄빙선처럼 기존 질서와 형식에서 벗어날 때 자유로운 디자인이 가능해지고, 이것은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단순히 길을 터 준다는 것 외에 지금 위치에서의 의무다. 또, 자유로운 후배 디자이너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중요한 역할이다.
디자인은 진보다.
디자인은 영원한 진보다. 기존에 만들어진 것에 항상 의문을 품어야 한다. 산학연관 모든 영역에서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유인이야말로 진정한 디자이너다. 중요한 디자인의 근본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약간의 보수적인 견해는 갖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도전과 진보의 정신을 가져야 진정한 디자인이 된다. 새로운 관점, 영역, 방법론, 태도, 그리고 행동이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마찬가지다. 새로운 시대에 디자인이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그 말이 진정 힘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헤르만헤세의 데미안이 되자. 스스로 주체가 되어 미지의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디자이너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