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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긁혔다’는 말의 풍경]

누구도 건드리지 말아야 할 ‘역린’이 있는 시대

by 김도형


우리는 일상 속에서 종종 “아, 글켰다(긁혔다)”는 말을 한다. 단순한 감정의 동요를 넘어, 이 표현은 어떤 특정한 트라우마, 열등감, 혹은 부정하고 싶었던 자아의 일면을 건드렸다는 감각에서 비롯된다. 누군가 나의 ‘발작 버튼’을 무심코 눌러버렸을 때, 그 반응은 예상보다 격렬하고 복합적이다. 긁혔다는 건, 누가 나의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逆鱗)을 건드렸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글키는 요소’는 오히려 더 많아지는 듯하다. 시간이 쌓일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정리하고, 더 단단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민감하고 더 복잡한 껍질로 둘러싸인다. 자신이 오랫동안 공들여 만들어온 성격이나 태도, 혹은 쉽게 바꿀 수 없는 습관에 대해 누군가가 무심코 말을 던졌을 때, 그것은 단순한 충고나 농담이 아니라 ‘긁는 행위’가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긁혔다’는 감정이 튀어나온다.


그러나 이 표현은 묘하게도 수동의 형태를 품고 있다. 내가 화를 낸 게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긁었기 때문이라는 구조이기도하고 “내가 널 긁었어”가 아니라 “너 왜 거기서 반응해?”라는 식의 책임 회피가 숨어 있다. 이상황에서 피해자는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되는 아이러니. 그런 점에서 ‘긁혔다’는 말은 누군가를 다치게 만든 이가, 되려 그 반응에 불편함을 느낄 때 쓰이는 무심한 위장어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사실, 긁혔다는 건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약점’이 건드려졌음을 의미한다. 아무 일 없는 척, 그냥 넘기고 싶지만, 이미 마음속에 파문은 일었고, 그 흔적은 오래 남는다. 그래서 ‘긁혔다’는 말은 단지 일시적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수없이 마주치는 감정적 역학의 한 장면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글킨다. 오히려 더 자주. 그러나 그 민감함이야말로, 우리가 여전히 무언가를 지키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의 내면 깊숙한 지점을 긁었을 때, 그것을 단순히 짜증으로 넘기기보다, 내 안에 무엇이 그렇게 반응했는지를 들여다보는 태도, 그것이 나이듦의 또 다른 방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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