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고래 Apr 05. 2023

오래 남은 기억

바닷가 마른 모래색

   


 발바닥에 닿는 모래의 감촉이 따듯했다. 한낮의 햇살을 머금은 모래알이 발가락 사이를 들락거릴 때마다 발가락이 간지러웠다. 그때마다 발뒤꿈치에 힘을 주며 모래 깊숙이 발을 디밀어 발목까지 모래를 채우곤 했다. 마른 발이 지나가는 발자국은 형체가 불분명한 작은 웅덩이처럼 움푹 패었다. 사람의 발자국처럼 보이지 않고 그냥 무언가가 지나간 흔적만 남았다. 


 파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백사장은 작은 사막처럼 보였다. 나는 그 사막 같은 길을 맨발로 걷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면 얼마나 걸었는지 거리가 가늠되지 않았다. 사막 같은 그 길에 이정표라 할 만한 것이 없어서 그랬다. 앞을 봐도 그렇고 뒤를 봐도 그렇고 그냥 모래밭만 펼쳐있다.     

 

 분명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그 짧은 순간에 모래가 허벅지를 감싸며 허리춤까지 차올라 있었다. 당황한 나는 발을 빼보려고 허리춤의 모래를 손으로 밀어내며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미 깊숙이 박혀있는 두 다리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처음에 천천히 백사장을 걸으며 한가했던 기억이 한순간에 질식해 버릴 듯한 공포로 변해 버렸다. 두려움이 커질수록 모래가 쌓이는 속도에 가속이 붙는듯했다. 눈 깜짝할 사이 모래는 가슴까지 쌓였다. 이제는 손도 자유롭지 못했다. 파묻힌 모래더미 속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팔을 빼보려고 했으나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굳어버린 석상 같은 느낌,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암울한 공포가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최대치에 이르자 모래는 목까지 차올랐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을 쳤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호흡은 불규칙해지고 머릿속은 하얗게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았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작은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가빠진 숨 사이로 또다시 모래가 쌓였다.  모래가 입으로 들어올까 봐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러는 순간 모래는 코밑까지 차올랐다. 가쁨 숨을 쉴 때마다 모래알이 콧속을 밀고 들어왔다. 더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이 이런 느낌일까? 

     

 모래가 눈 밑까지 쌓여갔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극도의 두려움만 남아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모래가 눈을 파고들어 오는 고통은 상상조차 피하고 싶었다. 공포감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이렇게 죽는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몸은 완전히 모래 속에 파묻혔다. 입안으로 콧속으로 귓구멍으로 모래가 버석거리며 몸을 옥죄어 왔다.  몸에 대한 의식과 호흡이 멈추는 불가항력의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눈을 떴다.      


 꿈이었다. 하지만 꿈을 깨고 난 뒤에도 한동안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이 모래에 파묻혀 버린 그 순간,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던 그 무서운 공포로부터 깨어날 때까지 그 밤의 어둠 속에서 멍하니 천장을 보고 누워있었다.      


 몇 시간을 꿈속에서 헤매다 눈을 뜨고 꿈이 현실이 아니었음을 안도하는 순간의 경험은 항상 아찔했다. 살면서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마다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었던 때가 있었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혼돈의 상태, 그 순간에는 무엇이 잘못인지조차 가늠되지 않고 어려움에 동동거렸던 기억들, 지나온 삶에도 이런 느낌의 시간이 있었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어리석음이 한참 지나버린 과거가 되어서야 어렴풋이 보였다. 지나고 나니 알겠다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겪어본 시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비무장지대 케렌시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