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고래 Apr 03. 2023

유정하게 또 유정하게

세월의 흔적이 오래도록 남아있는 색 위에 피어난 무지개



서운한 듯 아직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치시는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더 늦기 전에 미리 준비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마음이 먼저였다. 부모 자식 서로 건강하고 지혜롭게 살기 위해 찾은 방법이다. 엄마가 치매 검사를 받으시는 동안 나는 문밖에서 시험 보는 아이 기다리는 것처럼 걱정이 됐다. 초조했다.


 보호자 설문지를 작성하다가 눈물이 툭 떨어졌다. 딸아이를 수능 시험장에 들여보내 놓고 기다릴 때는 마음을 졸였는데 지금은 좀 더 잘 모시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어렸을 때는 엄마가 보호자이셨는데 이제는 역할이 바뀌었다. 중년의 딸이 보호자가 되어 엄마의 자리를 채워나가고 있다. 


 엄마는 자꾸 작아지고 사그라지며 부모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었다. 세월 앞에 변해 가시는 엄마 모습이 가끔 시리게 가슴을 친다. 25년 남편 병시중에 시어머니 모시고 어린 자식들 키우시랴 얼마나 힘드셨을까. 8남매의 맏이로 시집와서 줄줄이 딸린 시동생, 시누이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식구들 뒤치다꺼리로 당신의 삶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여자이기보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 살아오신 세월이 더 길었다. 그 혼곤했던 세월 뒤로하고 언제 저렇게 나이 드셨나.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고 화창한 봄날처럼 따뜻한 날들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거려 남의 일인 양 낯선 추억이 되었다.  


 파킨슨병을 10년 넘게 앓고 계신 엄마는 이제 아이 같은 어른이 되셨다. 나이가 들면 어린애처럼 된다고 늘 당당하게 말씀하신다. 맛있는 음식은 무조건 넉넉하게 드려야 흡족해하시고 간식은 머리맡에 쟁여놓고 드시고 싶어 하신다. 나물 반찬을 해드리면 냉장고에 풀밖에 없네, 고기 양념 볶음을 해 드리면 “나는 그냥 소금 찍어 먹는 게 제일 맛있어.” 평소 좋아하시던 창난젓을 사다 드리면 “어리굴젓이 더 좋은데”라며 투정을 하신다.  


  내가 어릴 적에는 자식이 먼저였는데 이제는 항상 당신이 먼저다. 말씀이 어눌하고, 행동이 느려지고, 판단력도 흐려지셨다. 요즘은 멍하니 허공을 보는 일이 잦다. “정신이 없어 바보가 된 것 같아” 하실 때도 있다. 그런 엄마를 가만히 쳐다보면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정들어” 하신다. 가끔은 나의 말에 엄하게 딴죽을 걸며 마치 떼쓰는 “아이처럼 너도 늙어봐 늙으면 다 그래”하시며 오히려 큰소리를 치신다. 그러시면서 고맙게도, 그래도 자식이 있어 다행이라는 말씀은 잊지 않으신다. 


 걷기 연습을 하시면서 다리가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푸념을 하셨다. 얼마 전까지 지팡이에 의지해서 천천히 걷기는 하셨는데 이제는 혼자서 걷는 것도 힘에 부치셔 자꾸 넘어지신다. 몸에 멍 자국이 가실 날이 없다.     


 어느 날은 백발에 파마하시겠다고 하셔서 휠체어로 모시고 미용실에 다녀왔다. 그날 하신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드셨는지 며칠 동안 거울을 손에 쥐고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뒤통수까지 궁금해하셨다. 매운탕이 먹고 싶다. 물김치 좀 사 와라, 동네에 둘레길이 새로 생겼다는데 가봐야겠다, 커피 마시러 갈까, 연관 고리 없이 떠오르는 대로 요구사항을 뭉텅뭉텅 쏟아 내는 엄마의 머릿속은 이제 따뜻한 봄날인가 보다. 봄꽃이 축제처럼 피어오르는 계절에 코로나를 이유로 나들이 한 번을 못 했다. 그저 가끔 집 앞에 있는 공원의 오가는 것 외에는, 그것이 아쉽고 미안하다.      


 아이처럼 씻기고 밥숟가락에 반찬 놓아드리고 이런저런 시중을 드는 일이 어떤 날은 힘에 부쳐 부아가 나서 툴툴거릴 때도 있다.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이렇게라도 곁에서 모실 수 있어서, 나는 아주 완벽히 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할 수 있을 만큼만 한다. 힘에 부치면 화도내고 잔소리도 한다. 큰소리 내며 다툴 때도 있다. 그래야 마음에 남는 것이 없다. 내가 지치지 않아야 엄마를 더 오랫동안 모실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지 가늠할 수는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동안 유정하게 살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마음이 서걱거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