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눈부터 이야기하자면, 전라남도로 넘어가는 고속도로가 마치 아이슬란드로 가는 길 같았다. 아이슬란드 방문객들은 이토록 거센 눈보라를 예상 못한 것이 분명했다. 전부 비상등을 켜며 무궁화호 기차 칸처럼 느릿느릿 줄지어 갔다. 곡성에 진입하자 한결 긴장이 풀렸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하얀 세상에 기분이 묘했다. 어느새 앙증맞게 빛을 반사하는 반짝거리는 눈이 온 밭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운전을 하면서도 멍하니 눈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옆자리 앉은 친구에게 말했다. 너와 함께 이번 연도 첫눈을 맞아서 너무 좋아.
2시간 전, 독서실 주차장에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빨리 준비 안 하고? 당황한 친구는, 우리 만나기로 한적 없거든? 그로부터 30분 뒤 군산 그녀의 아파트 앞에서 머리를 감고 나온 그녀를 맞이했다. 왜 갑자기 만나는지는 나도 몰랐다. 그냥 나는 오늘의 독서실 공기가 싫었고 그녀는 오늘의 연차를 집에서 보내기 싫은 것이 아다리가 맞았다. 점심에 그녀와 초밥을 배 터지게 먹고 어딜 갈까를 고민하다가 곡성에 있는 선배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곡성에서 농사를 지으며 멋지게 자립한 선배를 따라 작년 여름, 둘이 2박 3일 농활 체험도 함께 했었다. 친구와 나는 그 이후로 찾아간 적이 없어 마침 선배가 궁금하기도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나만은 어떠한 고질적 고민에 사로잡혀 바람 쐴 곳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 고민을 시골 풍경 어딘가에 묻히게 하고 싶었다.
고질적 고민 가운데 대표적인 건 바로 취업, 즉 일 문제다. 햄릿은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를 고민했지만 나는 일을 하느냐 마느냐의 취업문제를 햄릿처럼 고민한다. 일을 하느냐, 하고 있는 공부를 계속하느냐. 돈을 버느냐 돈을 까먹느냐. 안정을 취하느냐 모험을 하느냐. 지루한 인생을 사느냐 위험한 인생을 사느냐. 결국 편하게 사느냐 어렵게 사느냐의 문제. 며칠 전 어떠한 연구소 사무업무 관련하여 2년 계약을 제안받았다. 기존 직장보다 대우는 좋고 일은 흥미로워 보이긴 했다. 솔직히 사무업무가 흥미로워봤자지 싶다가도 그래도 어떤 연구 용역을 직접 수행하면 이것저것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싶다가도 그래도 공무원 공부한 게 아깝지 싶다가도 이렇게 제안받는 게 과연 지금 말고도 가능할까 싶다가도... 이렇게 <싶다가도>를 계속 도마뱀 꼬리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면 사람이 미치기 시작한다. 미치기 싫어서 곡성으로 출발했다.
곡성에 도착하자 백선배님이 멀리서 눈을 맞으며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 두터운 패딩과 등산 모자, 장화를 신은 백언니가 보였다. 급작스러운 만남답게 재밌어하시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니 작은 집이 나왔다. 목조 건축으로 지어진 옛 기와집을 이곳저곳 수리한 아담한 집이었다. 이 집의 최대 장점은 마당 뷰가 예술이라는 거다. 확트인 시야로 구불구불한 산새와 시골 풍경에 잠시 또 한 번 멍하니 넋을 잃었다. 마당을 구경하고선 추우니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매우 따뜻했다. 근사한 화목 난로 덕분이었다. 은은한 장작 냄새와 연통으로 퍼져 나오는 따뜻한 기운에 졸음이 왔다. 백언니는 난로 위에 귤을 올려서 구웠다. 귤을 구워 먹는 건 처음 봤다. 왜 구워 먹을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나의 미비한 창의적 발상이 안타까울 정도로 증~말 맛있다. 꼭 구워드세요. 마시멜로 말고 귤이요.
갑자기 온 만큼, 또 홀연히 떠나 줘야 매너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백언니의 사려 깊은 말에도 우리는 떠날 채비를 했다. 백언니는 구운 귤과 안 구운 귤, 그리고 떡과 고무 말랭이를 주셨다. 작년 농활 갔을 때도 마늘과 감자를 듬뿍 줬던 기억이 나서 웃음이 났다. 시집도 안 갔는데 고향 본가에 내려온 착각이 들었다. 두 딸들은 푹신한 눈을 밟으며 다시 차에 올라탔고 백언니는 버선발로 끝까지 마중을 나와 손을 흔들어주셨다. 시동 걸고 후진하는데 마치 행복한 사람을 사는 곳을 처음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곳도 이곳 나름의 그간 힘듦이 있었다고 말해주셨다. 그러나 지금은 행복하니 괜찮아! 하며 웃는 그 얼굴이 집에 돌아온 지금까지 생각난다.
아 맞다, 제비콩도 주셨다. 심으면 넝쿨처럼 자란다고 한다. 귀여운 콩콩콩
친구를 다시 군산에 내려다 준 후 독서실로 갔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노트북을 켰다. 그 연구소를 수신자로 해놓은 채. 죄송하다는 내용을 담은 메일을 몇 번을 적었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결국 다 적어놓고서는 보내기 버튼을 뚫어지게 바라만 봤다. 결국 보내지 못한 채 노트북을 닫고 집에 돌아왔다. 인생이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는다.라는 생각과 그래도. 언제라도 계속 계획을 틀다보면 결국 내가 원하는 종착지와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도 치열하게 싸우며 잠을 밀어내고 있다. 동시에 오늘은 오늘대로의 행복한 시간이 이미 흘러있어 마음 가득히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