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전화를 안 한 지 10일이 지났다. 강진 산속에 있는 아빠의 일상이 어떤지 더는 묻지 않는다. 서울을 오가며 다니고 있다던 임상실험도 어떻게 진행되는지, 약은 꾸준히 먹고 있는지, 요즘 운동은 하는지. 전혀 묻지 않는다. 그렇다고 궁금하지 않거나 걱정을 안 하는 건 아니다. 이 상태를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멀어졌다고 표현해야 할까. 나는 공부해서 어떻게든 번듯하게 살아내려는 일상을 살고 아빠는 차근차근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일상을 산다. 아빠를 떠나온 후로 내 삶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젠 떠나온 그 시작점도 흐릿하다. 언제였더라? 왜 떠났더라? 고작 몇 개월 고작 1-2년 안에 전부 발생한 사건이다. 아빠가 아픈 것도 언니가 아픈 것도. 그런데 왜 이렇게 수십 년이 흐른 것 같지. 아빠가 폐암을 진단받은 첫 응급실에서의 충격이. 1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의사의 야속한 목소리가. 왜 이렇게 까마득하게 굳어진 걸까.
이 상태를 좋게 말하면,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끊임없이 허우적대는 굴레를 벗어났다는 의미이고, 안 좋게 말하면 그냥 무뎌진 거다. 아무래도 후자 같다. 무디다. 이 단어만큼 내 상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이젠 누굴 만나도 어디를 가도 뭘 해도 무디다. 언니가 병원에서 골수이식을 받을 때의 비명 소리를 들어도 이젠 무디다. 아빠가 피가 섞인 기침을 해대도 이젠 무디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무디고 친구와 기분 좋은 농담을 주고받아도 무디다. 겉으로는 물론, 걱정하는 표정, 슬픈 표정, 재밌는 표정. 하…….그런데 이젠 못하겠어. 나 사실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겠어. 마음이 슬퍼지고 우울해지고 혹은 설레 하거나 따뜻해지는 게 뭔지도 사실 모르겠어. 기억이 잘 안나는 것 같아. 그냥 끊임없이 어디론가로 추락하고 있어. 불안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한데 동시에 그 불안마저도 그냥 돌덩이 같아. 돌덩이가 차갑다는 것만 느낄 뿐 무섭지도 피하고 싶지도 않아. 이런 걸 보면 지금의 내가 결코 행복하진 않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아주 오래전부터 이런 상태였던 것 같아. 훨씬 오래전말이야. 4년 전? 10년 전? 아니… 어쩌면 28년 전, 태어나고서 얼마 지나지 않은 때부터일까……. 이 말을 마음속에 숨긴 채 나는 어떠한 표정이든 우선 지으며 내일도 병원으로 간다.
연구소에 전화를 걸어 죄송하다고, 알바로라도 한번 해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땐 정말 그런 생각으로 말해서 상대가 나름 진정성을 느꼈을 법한데. 글쎄, 독서실 나와서 집에 돌아오며 생각해보니 그냥 어딜 다니기가 싫은 맘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고 뭔가를 열정적으로 하고 싶지도 않다. 물론 공부는 열정보단 의무감으로 하고 있기는 하다. 붙을지는 모르겠다. 안 붙으면 어쩌지라는 생각보다도 지금 하고 있는 공부 외에 내 리듬이 어느 순간 뚝. 하고 끊어질까 하는 생각이 더 두렵다. 끊어질까 가 아니라 내가 끊을까 두렵다. 몇 번 호숫가에 가서 멍하니 앉아 온 적이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조용히 물가에 적셔지는 밤공기를 마시며 수심 밑을 상상했다. 이게 원래 내 모습 같다. 별로 착하지도 충실하지도 않은 딸. 의지가 안 되는 동생. 다니다가 곧 그만두고 마는 노동자. 약속을 잘 어기는 친구. 끝없이 밑바닥을 보이는 연인. 고독이 편안한 외로운 사람.
심리상담을 해주는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나만의 캐릭터를 갖으라고. 주변 환경에 휩쓸리지 않는 자아정체성을 회복하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너무도 텍스트북에서 갓 끄집어온 듯한 전형적 고리타분함에 염증을 느꼈다. 자아정체성 따위는 그걸로 돈 벌어먹고사는 심리학자들 몫이고. 이젠 심리상담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걸 느낀다. 가기도 귀찮다. 아 오늘은 피부과 선생님을 만났다. 그보다 먼저 피부과를 갔다. 오른쪽 뺨에 작은 점이 생겼는데 좀 아픈 것 같아 인터넷 검색해보니 무슨 피부암 위험이 있대서 피부과에 갔다. 무서워서 가기보다 암이라는 이 단어가 주는 지긋지긋함에 서둘러 해결하고파서 갔다. 의사는 날 보자마자 반말을 하며 중고딩을 대하듯 내 얼굴을 이리저리 만져댔다. 그 무례함이 아무래도 동안 얼굴이란 증거가 되어 나름 뿌듯하기도 했다. 주사맞고 항생제 처방받고 나왔다. 그리곤 다시 독서실가서 공부하다가 집에 왔다. 아직 찌릿찌릿 하다.
그나마 요즘 쥐스킨트 <향수>를 밤에 집에 오면 조금씩 읽는다. 유일하게 인간다운 행위이랄까. 전에 다니던 직장 옆자리셨던 선배님이 매우 재밌다고 했던 책이다. 그녀가 보고싶다. 어쨌든 내가 그 살인자처럼 사이코패스가 되어가는 단계라서 읽고 있나 싶다가도 그 선배 말대로 쥐스킨트의 흡입력 있는 드라마에 어떤 경이로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미 체력이 소진된 상태로 읽기 시작하기에 곧 한두 페이지 못 넘기고 잠이 든다. 지금처럼….
그냥 일기 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