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메리 Jan 14. 2022

소설을 쓰고 싶은데

써도 될까 아빠? 아빠랑 같이 여기 살면서 다락방에서 소설을 좀 써보고 싶어. 이렇게 답했다. 몇 달 전 강진에 있을 때. 앞으로 뭘 하고 싶냐는 아빠 질문에. 대답을 들은 아빠는 피식 웃으며 그러라고 했지만, 나는 흘끔 보고서 눈치챘다. 아빠가 실망했다는 것을. 누구 하나 제대로 돈 버는 자식이 없다는 한탄이 그로부터 며칠 이후 아빠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고, 난 노트북을 켜서 문서창 대신 취업사이트를 켰다.


이렇게만 적고 이야기를 끝낸다면, 나는 마치 불땅한 효녀가 되고 아빠는 가부장적 고지식한 부모로 비칠 것이지만, 실은 그렇게 볼 필요 없다. 운 좋게 집 앞 박물관에 취업됐어도 원하지 않은 업무를 감당하기엔, 내 효심은 고작 한 달 짜리였다. 이래저래 그 이후 아빠와 좋지 않았고 결국 도망쳐 나왔다. 비겁하게. 아픈 아빠를 두고서.


아빠를 떠나서도 결코 소설을 쓸 엄두는 나지 않았다. 당연하지. 이제 혼자 벌어먹고 살아야 하는데 소설 쓸 시간이 어딨으며, 아빠에게 보란 듯이 성공하지 않으면 그 죄책감은 오롯이 내 몫일 테니까. 공부를 선택했다.고 우선은 아빠에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 2022년 1월 14일 금요일. 새벽 1시 52분에 생각한다. 도대체 난 뭘 선택한 걸까.


문서창을 열어 키보드를 두드리지 않았으니, 소설을 쓰지 않은 건 분명한데, 그렇다고 여태 그 긴 시간 동안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만든 결과물도 없다. 늘 마음속엔 소설 줄거리가 쓰인 A4 종이들이 공중에 흩날리고 있었고, 이제는 기회비용이라는 개념을 잔인하게 느낄 정도로 시간과 에너지를 멍청하게 탕진했다. 그와는 반대로 죄책감은 상환할 수 없을 만큼 위태롭게 쌓여 더는 눈감고 못 본 척할 수도 없게 일상을 테러하고 있다.


하루라도 벌을 제대로 받을 수만 있다면. 누군가가 너는 누구보다 비겁하고 쓰레기 같은 자식이라고 말해준다면, 그깟 인생이 뭔데 사라져 가는 아빠의 아픔을 위로해주지 않느냐며 따끔하게 혼내준다면, 맛있는 밥을 먹고 따뜻하게 잠을  자격도 없이 모든 자유를 박탈당해야 마땅한 범죄자로서 나를 심판해준다면.


그곳이 어디라도, 그가 누구라도, 눈이 가득하게 쌓여 뼈가 시리도록 차가운 아스팔트 도로 위라도, 맨 무릎을 꿇고 감사함에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싶다. 그리고서 평안하게 드러누워 흩날리는 눈보라에 턱끝까지 파묻히고 싶다. 이것이 내가 소설을 씀으로 탄생하는 운 없는 인물 한 명이 겪게 될 운명이다. 소설은 결국 잉태의 과정처럼 글자 안에 또 다른 나를 심어놓는 것과 같을 테니까 나는 그에게 결코 행복한 결말을 선물할 수 없는 거다.


소설 속에 자기를 심어놓는 건 작가가 의식하든지 말든지, 대놓고 하든지 은근히 하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 소설의 첫 문장을 쓸 때부터 이미 소설가와 인물 사이의 세포 공유는 시작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1952년 <노인과 바다>를 마지막으로 쓰고서, 1961년 7월 2일 엽총을 입에 문 채 방아쇠를 당겨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유작에는 인간은 결코 실패하게끔 창조되지 않았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불행한 자로 손가락질당한 노인이 결국 낚시질로 손아귀가 다 피투성이로 물들여질 만큼 거대한 생선을 잡고서 돌아오는 결말이다.


이 소설은 반세기 넘도록 세계 여러 나라에 사는 절망하는 생명에게 큰 위로를 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소설이 가장 필사적으로 필요했던 사람은 당시 헤밍웨이. 창작자 자신일 것이다. 어쩌면 그는 곧 살고 싶기 때문에 볼품없는 노인에게 해피엔딩을 맛보게 하지 않았을까. 9년 뒤, 이 소설이 끝내 헤밍웨이를 구하진 못했지만, 그가 이 소설을 쓰며 또는 쓴 직후에 단 하루라도, 단 일주일이라도 이 작품 덕분에 살맛이 났다면 소설은 그 탄생 가치를 이미 인정받은 거다. 노인의 피땀이 헤밍웨이를 위로했다는 거니까.


소설가와 인물의 관계를 친절하게 통찰하게끔 하는, 아주 존경하고 부활시키고픈 작가, 밀란 쿤데라. 그의 소설 일부를 소개하겠다.



“이미 말했듯 소설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장, 그리고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여전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근본적이며 인간적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은유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작가란 자기 자신 이외의 것은 말할 수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는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나의 자아가 끝난다.--에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p.361~362.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소설 속 인물에게 벌을 내리고,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게끔 하고, 끝내는 구원받아 평안을 되찾게 한다면. 비겁한 딸로서 살아가는 이 일상이 즉, 함정으로 변해버린 내 자신의 세계 속에서, 그나마의 인간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 현실의 경계를 넘기엔 난 너무나 비루하고 추접스러우며 고달프게도 겁쟁이지만,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면 그 의문을 돌파할 생각을 궁극엔 하지 않을까. 내 삶의 은유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못하지만, 다만 내가 소설 속 인물에게 속삭이듯이 진실을 말할 때 현실의 내가 깨달아 위험한 은유로부터 벗어나지 않을까. 이런 말을 적다 보니 드디어 잠이 오는 순간이 찾아온 것 같다. 물론 잠을 깬 후엔 소설 생각이고 나발이고 날아갈 듯 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그냥 일기 -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