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메리 Nov 02. 2022

잔인한 스물아홉 생일

오늘은 내 생일이다. 아침 출근길, 20대 초반에 설정해놓았던 구글 캘린더 알람이 울렸다.

"내생일>_<"  

이때까지만 해도 내가 태어난 사실에 기쁨을 느꼈나 보다. 이 마음이 얼마나 아득한지. 슬프게도 지금의 나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자살뿐이라고 했다. 자살은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행위이기에 그만큼 논의에 수반되는 책임이 다른 철학적 문제보다 크다는 것이다.


"숨 막히는 하늘 아래서 살게 되면 거기서 빠져나오든가 아니면 그곳에서 버티고 있든가 둘 중 하나뿐이다. 전자의 경우는 어떻게 하면 거기서 빠져나올 것인가를, 후자의 경우 왜 거기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한다." -<시지프 신화>


요즘 숨 막히는 하늘 아래서 한계를 느끼고 있다. 저번 주말에는 새벽 1시쯤이었던가. 1393에 처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아준 여성 상담원 덕분에 나는 그날 새벽 죽지 않았다. 상담원께서는 왜 죽고 싶은지, 구체적인 자살 계획이 있는지 여부를 물었다. 목이 매여서 제대로 답이 어려웠다. 당시가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지금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대체로 "죄송합니다."로 답했다. 내가 제대로 말을 하지 않고 계속 죄송해하자, 상담원은 각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연계해주겠다고 하고 통화는 끝났다.


통화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 새벽이라 전화가 울려서 깜짝 놀랐다. 아까 그 상담원이었다. 내가 걱정이 된다며 다시 전화를 한 거였다. 나는 다시금 죄송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젠 괜찮다고, 많이 진정이 되었다고, 감사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결국 다 털어놓지도 못할 거면서 1393에 전화는 왜 했을까. 그러나 실제 아픔을 털어놓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털어놓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이다. 나는 나와 같은 인간이 내가 죽을까 봐 걱정을 해서 다시 내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 자체에 위로를 받았다.


알베르 카뮈는 매우 오랜 시간을 투병생활을 했다. 그렇기에 그의 자살 딜레마 논의는 힘이 있다. 카뮈도 살아있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을 테니까. 누구보다 자살을 가장 강렬하게 실천하고 싶었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살아있음을 택했는데, 이는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카뮈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은, 철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은 <시지프 신화> 따위는 읽지 않고 죽는다는 것이다. 자살은 카뮈가 이성의 흐름으로 추적한 철학적 계산 결괏값이 될 수 없다. 자살은 마치 콜라 같은 것이다. 그냥 땡길 때 먹는 탄산음료처럼, 자살은 대체로 충동적이며 치밀해질 수 없는 유일한 인간 행위이다. 치밀해지려면 사후세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예수처럼 3일 정도는 죽어봤다가 다시 목숨 아이템을 먹고 삶 속으로 재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잔인한 삶을 끝내고자 죽어도, 죽은 이후 삶이 평안한 지를 알아야 하는데, 알 수 있는 삶 자체가 사라져 있기 때문에. 자살은 그냥 하는 거다. 죽고 싶으니까.


~때문에 죽고 싶다. ~를 피하려고 죽고 싶다. ~를 위해서 죽고 싶다. 는 모두 거짓말이다.

죽고 싶다. 는 이 짧은 한 마디면 된다. 카뮈는 틀렸다.


나는 작년부터 정말 죽고팠는데. 머지않아 큰언니와 아빠가 죽게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차례를 시도했고, 그때마다 실패했던 이유는 남아있는 가족이 불쌍해서였다. 장례를  번을 치러야 하는 엄마가 불쌍했고, 어린 조카가 감당해야  사나운 슬픔이 무서워서였다. 하지만 정말 나만을 생각했다면.  세상에 나만을 가장 우선적으로 신경 썼더라면, 나는 진작에 죽었을 거다. 아빠와 언니의 차갑게 식은 얼굴을 보기 전에.


지금 나는 그때의 예상대로, 그 둘의 영안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정신과를 가면 해결될까? 심리상담을 받으면 해결될까? 결국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아픔을 입으로 말해야 할 텐데, 의사 앞이든 친구 앞이든 가족 앞이든 애인 앞이든, 함부로 이 아픔을 꺼낼 용기가 없다. 이렇게 하루하루 버티다가 어떻게 해서든지, 몇십 년 후에서든지. 마침내 죽음이 찾아오면. 그때는 그 사후세계가 지옥이라 해도 환영할 것만 같다.


삶은 잔인하다. 뜻대로 얻는 기쁨보다는 되도록 피하고 싶은 슬픔과 아픔이 삶을 좌지우지하는 힘이 더욱 세다. 이 잔인함에 삶을 향한 배신감을 느껴 모든 것을 향해 분노가 쌓이고, 거절과 버려졌다는 사실이 겹치다 보면 결국 내가 태어난 날이, 태초에 잔인함의 시작이란 걸 깨닫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아빠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