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메리 Mar 01. 2024

세 번째 사직서

<상기 본인은 위와 같은 사유로 사직하고자 하오니 조치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A4가 가장 시적이게 될 때. 평소 만지던 종이가 유난히 낯선 질감으로 만져질 때. 사직서를 제출할 때다.

이번이 세 번째다. 스물다섯부터 시작한 직장생활, 서른 하나에 세 번째 퇴사라(물론 윤석열 나이로는 만 29세임)... 많은가? 적은가? 보통인가? 정상궤도를 벗어난 걸까? 일반인 기준에서 이탈한 걸까? 어휴 뭐든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이번엔 고민이 좀 됐다. 급여 수준이 꽤 높았다. 직급도 팀장이었고 일도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해서 수월했다. 뭐가 문제였니? 묻는 친구말에, 내가 그냥 문제 같아.라는 말밖엔 나오지 않았다. 이젠 애써 남 탓을 하기도 지치고, 뭐 몇 마디 덧붙인다고 해도 그도 알고 나도 아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결국엔 내가 제 발로 나왔다는 것.


첫 직장에 다닐 때다. 당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상사가 해주신 말씀이 기억난다.

"고인 물이 되지 않으려면 직접 안에서 그 조직을 바꾸던지, 바꿀 수 없다면 그 조직을 나오든지 해야 한다."


아무래도 쓸데없는 가르침을 너무 깊게 새긴 걸까. "그냥 닥치고 고인 물이든 썩은 흙탕물이든 존버하라"라고 첫 직장에서 깨달았다면 아마 우리 부모님은 좋아하셨을 텐데. 딸이 어느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나온다는 사실을 기뻐할 부모는 없을 테니까. 엄마 미안해. 아빠도 살아계셨더라면 안타까움을 숨기며 애써 그래 수고했다고 말해줬겠지.


"우리 적당히 하자. 감사가 제일 무섭다. 우린 결국 직장인이니까 너무 온 열정을 쏟지 마라. 위험한 짓은 하지 마라. 네가 일을 잘하니까 다들 너한테 의지해버린다."


그래 회사를 다니는 가장 큰 핵심은 결국 월급이니까. 당신 말이 다 맞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런 태도를 강요받는 게 지겨웠어. 갑자기 내 업무를 중단시켰을 때도. 뭘 잘 모르는 어린애로만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을 때도. 설득이 소용없는 행위임을 깨달을 때도. 조직의 학습된 멍청함으로 유지되는 그 권력이 지겨웠어. 날 좀 믿어줬으면 안 됐어?


조화롭지 못한 사람이 되겠다는 이 선택에 비웃겠지만. 스스로도 웃기지만. 그래도 피식 웃고 사직서를 내는 젊음을 최대한 누릴래. 언젠가 나도 당신이 했던 말을 똑같이 동료에게 할 수 있겠지.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그때를 늦추는 걸 선택할래. 일을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깨끗하게 손 터는, 그런 사람으로 계속 살래. 꾸역꾸역 이게 잘못됐다는 걸 알아도 월급 때문에 두 손 놓고 있는 직장인이 되고 싶진 않거든.

  

세 번째 사직서를 내고서 퇴근하는 길이었다. 일부러 신나는 곡을 들으며 운전을 했다. 그러나 마음에서는 분노와 창피함, 억울함, 애써 신나 보려는 역겨운 눈물이 흘렀다. 결국 열심히 오랫동안 다니고 팠던 직장을 하나 놓았고, 애매한 4개월짜리 한 줄 경력을 얻었다.


아, 물론 좋은 점도 있다. 소중한 인연을 얻었다. 지역에서 만난 주민이다. 짧았지만 함께 행복했다. 그만둔다는 소식을 듣고 퇴근 후 소주 한잔을 사주신 그분들께 감사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웃으며 창업할 거란 내 말에도, 위로해주고 싶다고 말해주셨어서 감사하다. 지역에 계속 있고 싶은 이유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시는 분들이다. 그분들 덕에 불타던 속이 깨끗하게 씻겨나가는 것 같다.


이렇게 보니, 세 번째 사직서! Not so bad!

작가의 이전글 It is what it is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