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석 Feb 05. 2022

'그거' 있잖아, '그거'

지시대명사로부터 비롯되는 오해를 줄이기 위해

언어의 체계에는 '지시대명사'라는 단어가 있다.

사전적 정의를 빌리자면, 이는 '어떤 사물이나 처소 따위를 이르는 대명사'를 일컫는다.

다르게 말해, 직전에 언급되었거나 대화의 참여자(들)가 동시에 인지하고 있는 물건이나 사건을 지칭할 때 짧게 줄이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이다.

"우리가 어제 슈퍼마켓에서 산 딸기맛 우유 신상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긴 단어를 매번 말할 수는 없으니 지시대명사를 활용하여 '이것'이나 '그것'으로 짧게 부른다.


간편함과 신속함을 위해 사용되는 지시대명사지만,

동시에 난처한 상황을 많이 만들어내는 주범이기도 하다.

입사 1년 차인 당신. 어느 날 과장이 불러 찾아간다.

"저번 주에 내가 말한 그거 있지? 오늘까지 꼭 해 와"

이런 말을 선임에게 듣게 된다면 정말이지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시간은 일주일도 지났고 흘려들은 것들도 많은데..'
그래서 용기 내 무엇을 말하는 건지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짜증이다.

"그런 것도 몰라? XX부서에서 요청한 건 있잖아. OO씨는 왜 이렇게 센스가 없어, 센스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XX 부서는 우리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부서로 하루에만 협조 요청만 수십 건이 들어온다. 하지만 여기서 더 물어봤자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짜증과 비난이기에, 질문만 가득 품은 채 적당히 물러난다.


위 상황에서 쓰인 '지시대명사'는 문법 상으로 잘못된 부분은 없다.

하지만 지시대명사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의 관점에서는 핵심을 전혀 놓치고 있다.

첫 문단에서 언급한 지시대명사의 정의에서 이 부분을 찾아볼 수 있다.


직전에 언급되었거나 대화의 참여자(들)가 동시에 인지하고 있는 [...] 사용하는 단어


"동시에"라는 단어는 대화의 두 참여자가 같은 대상을 떠올려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이 지시대명사의 핵심이자 올바른 쓰임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만약 말하는 사람이 가리키는 바를 듣는 이가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지시대명사이다.




위 예시에서 알 수 있듯,

지시대명사를 쓸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설령 귀찮을지라도 정확한 의사소통과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자세히 말함을 몸에 익혀야 한다.


하지만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어제 슈퍼마켓에서 산 딸기맛 우유 신상품'을 대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말해야 하는 건가요?"


여기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 시작점으로 지시대명사의 목적을 되새겨보자.

지시대명사는 양측이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대상에 대해 짧게 줄이기 위해 사용된다.

바꿔 말하자면, 지시대명사는 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목적이 수단에 우선한다고 생각한다면, 목적을 위한 수단을 가변적인 것으로 바라본다면,

지시대명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이것'이나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도출할 수 있다.

심지어 그 수단이 목적을 달성함에 있어 결점이 존재한다면, 다른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더욱 매력적인 선택지가 된다.


'어제 슈퍼마켓에서 산 딸기맛 우유 신상품'을 다시 가져와보자.

위 물건을 '그것'으로 줄임에 따라 대화의 참여자가 다른 대상을 떠올리게 하는 여지가 생긴다면,

하나의 단어로 몽땅 줄이는 것보다 몇 개의 단어만 차용해서 줄이는 방법은 훌륭한 대체제가 되어줄 것이다.


'어제'라는 단어는 기간을 특정하기 때문에 필수적인 요소라 볼 수 있다.

만약 상대방이랑 어제 간 곳이 슈퍼마켓 밖에 없다면 '슈퍼마켓에서'는 생략해도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신상품은 쉽게 접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에, 물건을 특정하는데 꽤나 유용한 정보이다.

이런 식으로 줄여나가다 보면 '어제 산 신상 우유' 정도로까지 줄일 수도 있다.


물론 여기에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렇게 줄여도 상대방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지, 어떻게 줄이는 것이 효과적인지, 

그리고 어디까지 줄여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렵고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은 작업이지만,

그만큼 불필요한 오해의 해소와 신속한 의사소통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방법이다.




오해는 양측의 상이한 생각으로부터 기인한다.

그 생각을 일치시키는 것이 오해를 해소하는 첫걸음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 글에서 언급한 지시대명사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에 속한다. (일반적인 경우까지 다루고 싶었지만 그러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지고 산으로 가서, 나중에 더 깊게 고찰한 다음 풀어보려고 한다) 

그래도 '이것'이나 '그것'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이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쓰임새에 대해 돌이켜보고 고쳐나가려는 것으로부터 노력이 시작된다고 본다.

필자 스스로 꽤나 의미 있던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이야기를 품어보고 깊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결핍을 배우기로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