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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목하 Feb 08. 2024

순수하게 무언가를 사랑하고 열망할 수 있는가



☘️ 나는 어린 시절 한자를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 한문 수업이 시작되면 반 아이들 중 혼자만 신이 났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께서 칠판에 한자를 적으면 나는 그 글자의 뜻과 음을 말하는 걸 즐겼다. 



한자를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한자를 공부하면서 그 매력에 서서히 빠져들었다. 한자는 한 글자를 구성하는 각 조각(요소)들이 의미를 지닌다.  그 조각들의 의미를 조합해 실제 그 글자가 가지는 뜻과 관련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 즐거웠다.



예를 들어 아름다울 미()는 양 양()과 큰 대()로 이루어진 글자다. 몽글몽글한 털이 풍성하게 자란() 양()의 모습이 떠오른다. 아름답다. 이는 물론 그 한자가 가진 본래 유래와 다르다. 하지만 이렇게 내가 떠오르는 그림체와 이야기를 글자에 담으면서 그 글자는 나에게 특별한 글자가 된다.



내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사춘기 시절, 나는 그 한 글자 한 글자에 이야기를 지어내는 시간이 좋았다. 방학이 오면 몇 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한자 하나하나를 뜯어보고 이야기를 지어내곤 했다. 복잡하고 힘든 마음을 잠재워주는 고마운 친구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이과였다. 수학, 과학과는 달리 한자는 문이과 공통 과목이었고, 같이 시험을 보고 등급을 매겼다. 나는 한자 시험에서 계속 1등을 했고, 이를 한자 선생님께서 신기해하셨다. 성정이 워낙 밝고 고우신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되려 고맙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과 친구들은 한자에 관심이 특히 없다는 것이 선생님의 고민이었던 것이다. 선생님께서는 가끔씩 맛있는 것들이 생기면, 내 손에 슬그머니 쥐어주셨다. 시험시간이 돼서 선생님께서 감독을 맡으셨을 때, 내 머리맡 고장 난 에어컨을 감독을 보다 말고 고쳐주려 하셨다. 내가 성인이 된 이후로도, 타지생활을 하는 나에게 쿠키를 보내주시며, 지금까지 나를 응원해주고 계신다. 한자가 나에게 준 소중한 인연이다. 



그렇게 한자는 내게 혼란스러운 시기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주고, 소중한 인연을 선물해 줬다.



지금은 한자를 놓은 지 꽤 돼서 많은 글자들을 까먹었다. 하지만 지나가다 한자를 볼 때면 괜스레 진한 향수가 느껴져 걸음을 멈추고 말 한번 건네본다. 



☘️ 최근에 한자와 같은 사람을 만났다. 


볼펜보다 붓을 쓸 거 같다. 
자동차보단 자전거를 좋아한다.
아이돌 음악은 모르지만 클래식과 재즈에는 조예가 깊다.

깊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건네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담백한 마음이 담겨 있다.



그 사람은 배움의 지름길을 찾지 않았다. 차근차근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향해 땅을 지그시 밞아 나가는 사람이었다. 빠르고 차갑게 지나가버리는 세상의 틈바구니에서도 그는 차분히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대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묵묵하고 슴슴한 그를 여느 세상과 다름없이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함께 서로의 삶을 얘기하면서, 그 슴슴함이 그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담겨 깊게 고아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끓어오르지 않았다. 천천히 자신만의 온도대로 고아지고 있었다. 그 깊음이 그의 말과 행동에 배어 있었다. 



자극적이지 않는 순수한 사랑(열정)으로부터 우려진 멋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에게도 깊게 밴 그는 더 이상 지나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 한자는 한 글자 한 글자가 쓰기 어렵지만 쓰고 나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자를 하나씩 뜯어보며 이야기를 지어나가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시키지 않았지만 그저 혼자 한자를 좋아했다. 묵묵히 그 배움을 즐겼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더 집중력이 옅어졌고, 한 가지를 시작하더라도 더 계산적이고 효율적인 방향으로 생각하게 됐는지 모른다. 그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만큼 하나를 순수하게 사랑하고 열망하는 힘은 약해지지 않았나 싶다.



삼십을 향해가면서 부쩍 어른스러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단순히 자연의 법칙에 따라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라, 더 익어서 멋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난 배움에 대한 순수한 사랑(열망)을 지키고 싶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이기와 이타에 의해 씌워지는 탈이 생기겠지만, 탈 속 순수함을 잊다가 이내 잃고야 마는 삶을 살고 싶진 않다. 



내가 뱉는 입김으로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녹이고 싶은 꿈이 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계산이 필요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순수하게 무언가를 사랑하고 열망하는 것. 그것이 내 영혼을 맑게 닦아 나 자신을 온전히 지켜내는 힘이 아닐까. 나아가 내가 부는 입김이 닿는 세상까지도 말이다. 



아직 순수하게 무언가를 또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열망하려는 나에게 그가 다가섰고 나를 안아줬다. 그래도 돼. 그게 너의 개성이고 매력이야. 따뜻한 입김과 함께 그 상대적 어른은 어른이 되어가는 나를 안아줬다. 서로를 안았다. 한자처럼 천천히 고아지며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서로를 위해. 아니 자기 자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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