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루실을 맞닥뜨리면 그 해맑고 무심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을 보면 그 모든 것이 그녀한테는 부끄러운 결점이라기보다는,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현실로부터 돌려놓는 동물이 그녀 안에 숨겨져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앙투안은 10분 전만 해도 경멸하던 것에 대해 희미한 존경심마저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범접 불가라고 할까. 루실의 행복하려는 의지가, 원형 그대로의 온전하고 순수한 이기주의와 무심함이, 그녀를 범접불가한 존재로 만들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패배의 신호'
과거의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그저 흘려보내던 것들이 언어의 색을 입었다. 나라는 사람의 면면이 발견되어 지도로 만들어졌고, 전시회에 펼쳐진 거 같은 부끄러움과 묘한 재미를 느꼈다. 우연히 어떤 책을 만나게 됐을 때 느끼는 부끄러움과 재미다.
'패배의 신호'라는 책에는 샤를과 루실이라는 연인이 등장한다. 자산이 많고 중후한 매력을 갖춘 중년의 남자 샤를, 매력적인 외양으로 샤를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십 대의 젊은 여자 루실. 그 둘에 대한 이야기를 읽는 내내 첫 남자친구와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분명 샤를과 루실의 관계와는 다른데도 말이다.
나와 첫 남자친구는 스무 살, 스물두 살에 서로를 만났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풋내 잔뜩 어린 둘이었는데, 나름대로 우리가 어른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아직도 그가 나에게 쓴 고백 편지가 기억에 남아있다.
'재희, 우리는 성인군자예요. 성인군자 둘이서 연애하지 않을래요?'
썸이라는 개념도 몰랐던 모태솔로 나는 그렇게 성인군자라고 자칭하는 그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와 있는 나는 늘 사고뭉치였다.
"재희랑 있으면 매일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야. 왜냐면 그 소설의 구성단계가 다 들어있거든... 위기... 절정... 결말.......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긴장되는데, 재밌어. 재희랑 있으면."
그는 나의 못 말리는 열정과 그 열정에 버금가는 덤벙댐을 늘 사랑으로 감싸줬다. 한창 연애 초반 잘 보이고 싶을 때였다. 설빙에서 인절미 빙수를 시켰는데, 얼음 위에 얹힌 콩가루를 무심결에 먹다가 사래가 걸렸다. 앞에 앉아있던 그에게로 내 입안에 있던 콩가루들이 무자비하게 날아갔다. 얼굴과 옷에 콩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채, 온화한 미소로 해탈한 듯 미소를 짓던 그. 그때 알았다. 그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바지 위로 맥주를 잔뜩 쏟은 날, 카페 화장실에 갇혀있던 나를 그가 구해준 날 등 많은 날에 나는 사고를 쳤고, 그는 사고를 수습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자신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나를 더 걱정하고 챙겨줬다. 어이가 없다는 듯, 역시 우리 재희라는 듯, 재밌다며 웃는 그였다.
"아니 나는 괜찮은데, 재희가 너무 미안하겠다......."
그렇게 마냥 나를 감싸는 그 덕분에 나는 어리고 여린 마음을 간직하며 이십 대를 보냈다. 차가운 세상으로부터 받는 상처로 인한 굳은 살이 충분히 베기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를 함부로 미워하거나 욕하지 못했던 나를 대신해, 그는 나보다 더 분노하며 그 누군가를 욕하고 나쁜 사람을 자처했다. 열정만 가득하고 겁이 많았던 나를 위해 내 일을 도와줬다. 하루 종일 또는 새벽까지 자신의 시간을 쪼개가며 내 일에 나보다 더 열정과 정성을 쏟았다. 그는 내가 꿈을 이루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열정적이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내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무심코 그가 한 말이 아직 기억에 남아있다.
"아... 진짜 재희야 제발 성공해라......."
단순히 "재희야 너는 성공할 거야"라는 말보다 더 나의 꿈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말이었다.
그와의 오랜 연애를 정리할 때조차 그는 나에게 모질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헤어짐의 쓴 맛을 경험하지 않았다. 헤어질 때 그는 나에게 사랑을 알려줘서 고맙다 말했고, 진짜 사랑했다는 말을 건넸다. 헤어짐을 말하는 그런 내 모습마저 용기 있다고 여기며, "진짜 용감하다... 역시 내 이상형......."이라며 아린 탄성을 뱉던 그였다. 끝을 먼저 말하는 나의 말이 모질게 느껴졌을 걸 너무도 잘 알던 나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위한 말이 아닌 나를 위한 말을 했다. 그 마지막 순간에 그가 했던 유일한 모진 말이 있다.
"정말 나 없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어?"
이십 대 대부분을 그와 함께 보냈고, 그렇게 나는 굳은 살이 배길 필요가 없이 보내왔다. 그래서인가 보다. 나는 굳은 살이 베기지 않은 듯한 루실을 보며, 괜스레 부끄러워졌다.
그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줬던 선물은 **로랑에서 산 명품 립스틱이었다. 무슨 특별한 날도 아니었는데, 대뜸 자신이 쓴 편지와 함께 건넸다.
"그냥 주고 싶어서......."
내가 마지막으로 그에게 줬던 선물은 그의 생일날 준 파란색 가디건과 블루베리 케이크였다. 나보다 형편이 어려웠던 당시의 그는 의례적인 커플의 날이 아님에도, 자신의 코 묻은 돈으로 나를 위해 선물을 샀다. 어쩌면 나는 재미만 찾는 풋내기 사랑에 머물렀고, 그는 우리의 사랑을 고아내며 숙성시키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에게 세상의 차가움을 굳이 말하지 않았고, 자기 선에서 그 차가움을 쳐내고 견뎌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내 곁엔 그가 없지만, 나는 그 덕분에 조금 느리게 차가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었다. 덕분에 마음의 굳은 살이 아닌 근육을 천천히 키워나갈 수 있게 됐다.